[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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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개구쟁이 (2)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또 아버지를 졸라 기차를 처음 타게 된 날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미곡상을 하셔서 항상 읍에 다니셨지만, 좀처럼 나를 데리고 가시는 일은 없었다. 읍 구경을 시켜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아버지는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루는 몰래 아버지 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벼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사촌 형이 끌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걸어 가셨다. 나는 수수나무 3미터를 잘라서 앞을 휘어 그것으로 땅바닥을 밀면서 아버지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이따금 무심히 뒤를 돌아보면서도 다행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내가 따라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정주 읍에 거의 다 와서야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너 봉덕이 아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부탁이 있어서 따라왔어요.” 

“니 부탁이 뭔데?”

“기차 한 번 타 보게 해 주세요. 그게 소원이에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내 어디까지 갔다 오고 싶은지 물으셨다. “곽산까지요!” 나는 미리 생각했던 대로 대답했다. 곽산은 정주읍에서 30리 떨어진 곳으로 기차를 타면 왕복 한 시간 거리였다. 결국 나는 생애 첫 기차여행을, 그것도 혼자서 하게 되었다. 촌놈이 처음 기차를 타니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갑자기 뭐라도 된 기분이었고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어깨가 절로 으쓱거려졌다. 내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꿈에 그리던 중학교

나의 집안은 대대로 수명이 짧아 손이 귀한 집이었다.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도 20대에 작고하셨고, 우리 아버지도 40대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촌 형 둘을 나와 함께 키우셨다. 농사를 짓고 미곡사도 하셨지만, 아버지 혼자서 여러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수월할 리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첫째 사촌 형은 초등학교를 졸업 후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둘째 형만이 정주읍에 있는 2년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뒤로 형편이 나아졌지만 아버지는 내 진학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셨다. “내 아들만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것은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나이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과 배워야 한다는 뚜렷한 주관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에 찾아가 아버지의 발뒤꿈치를 졸졸 따라다니며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자주 졸랐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는 나의 진학을 허락하셨지만 오랫동안 망설이신 탓에 1기 시험학교인 오산과 선천중학교에는 지원하지 못하고, 2기 시험학교인 3년제 선천상업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마을 아이들에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봉덕이는 좋겠다”, “봉덕이는 이담에 커서 크게 되고 장가도 잘 가고 출세하겠다”며 질투 아닌 질투를 하곤 했다. 실제로 마을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이었다.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지만, 수학만은 예외였다. 이러다가는 중학교 입시에서 수학 때문에 곤란해지겠다 싶어 오직 중학교 입시를 위해 5학년 수학책 두 권, 6학년 수학책 두 권을 달달 외웠고, 덕분에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수학을 96점 맞았다. 하지만 내 관심은 공부로 이어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늘 첫 번째였다.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그렇게 떼를 써 놓곤 관심사가 노는 것이었다는 게 이상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드디어 시골아이가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선천으로 가서 꿈에 그리던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는 하숙집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다. 2학년 1학기에 한 학우와 동거하게 되었는데, 그는 1년 선배이나 진학을 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는 흡연을 하고, 여자 친구를 하숙방에 자주 불러서, 그때마다 나는 자리를 뜨곤 했다. 어느 날 둘이 무엇 하나 보기 위해 옆방에서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흡연을 하고 화투를 치면서 이긴 사람이 상대편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치며 놀고 있는게 아닌가. 예쁜 여학생의 손목을 한 번 잡아보고 싶은 마음에 그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피울 줄도 모르는 담배를 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 번을 이기지 못하여 예쁜 여학생의 손목을 잡아보지 못했다. 그 후 나는 그 선배를 따라 선천 시내를 일없이 두루 다니고 매일 해뜨기 전에 점포에 가서 담배를 사 그에게 바치기 일쑤였다.

1942년 4월, 이때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다.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하고 더 진군하려는 시기여서 학생들은 정규적으로 수업을 받지 못하고 농촌봉사대로 자주 동원되었다. 2학년 초에는 의주농업학교 교장이 전근을 오면서 상업학교를 농업학교로 바꾸어 교과 내용도 달라지게 되었고, 학생들은 농촌봉사뿐만 아니라 기병대의 마초를 채집하기 위해 자주 교실을 나서야 했다. 한편 학생들은 밤에는 돈을 모아 고기와 배추를 사다 술을 자주 마셨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학생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투전하고 개를 잡아서 먹는 분위기였다.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뭔가 종말적인 느낌이 강했다. 건전하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가기보다는 매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판이었다. 형뻘 되는 조합장은 대대로 내려오는 부자였는데,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막대한 유산을 어처구니없게도 술과 돈내기로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덕분에 살 수 있었다. 1947년 당시 이복 공산당 정부는 땅을 다섯 정보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라고 해서 모두 찾아내 숙청했는데, 조합장은 숙청 대상에서 제외될 정도로 재산을 다 탕진했기 때문에 추출되지 않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개를 잡는 날은 동네에 잔치가 벌어졌다. 중학생 또래들이 무리지어 구경을 하고 있으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너희도 이리와라”며 손짓을 하곤 했다. 기회다 싶어 우르르 몰려가면 아저씨들은 고기와 술을 나눠 주었다. “너희 나이가 열여섯, 열일곱이지? 그럼 막걸리로 배울 때가 됐구나. 니들끼리 몰려다니면서 구석에서 마시지 말고 우리 앞에서 제대로 배워라. 처음 배울 때 어른한테 배워야 평생 실수도 안 하는 법이다. 자, 한잔 받아라.” 동네 어른들이 따라 주시던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알싸한 취기를 느껴보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마을에서 주로 마시던 술은 지금처럼 가게에서 파는 술이 아니라 집에서 만든 밀주였다. 당시 웬만한 집에서는 과실주를 만들 듯 다 밀주를 만들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술 체질인 집안 내력을 생각해 볼 때, 내가 만약 예수를 안 믿었으면 지금쯤 매일 한 잔씩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애주가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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