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질병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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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평생 사노라면 질병으로 인하여 고생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성도들이 개인적인 기도를 할 때 질병에서 치유 받게 해 주기를 기도하는 내용이 거의 절반이라는 보고서가 있다. 질병이 자신이나 가족에게 생기면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드리게 된다. 우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고침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해 의심하고 원망하기 쉽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은 왜 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나를 미워하시는가? 기도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임신한 순간부터 현대 의학으로 치유 불가능한 유전적인 병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도 있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같은 병을 가지고 태어날 확률이 높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한탄한다. ‘신유 집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부흥 집회도 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흥사는 모든 질병은 오직 믿음으로 고칠 수 있으며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병원에만 가면 가볍게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기도만 하다가 자녀를 죽게 만들어 과실 치사와 아동 학대 혐의로 부모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유아 사망률은 일반인의 3배에 이르렀다. 집에서 출산하다가 사망하는 비율은 100배 이상이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대 기독교의 유명 작가인 미국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 ) 목사의 말이다. “그리스도인 농부가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 나무를 심거나 뜨겁고 메마른 사막에다 벼를 심어 놓고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자연 법칙에 순응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기도의 능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늙어가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를 도와 주셨다. 죽은 소녀의 생명을 살려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은 선택적이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신 것은 아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주님의 권능에 의지해서 병자를 치유해 주고 죽은 자를 살렸다. 그러나 두 사도가 모두 감옥에 갇히고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바울이 목회 서신을 전한 것은 기적적인 방법이 아니고 모두가 일상적인 방식을 따라서 행해졌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기에 기도할 뿐이다.’(윌리엄 제임스) 그렇다고 기도 응답을 당연한 권리로 주장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자세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 즉 인체에 내재된 치유력과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의학 지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를 받는 환자는 사망자가 25% 줄어들고, 약물 사용을 줄여도 좋을 만큼 회복 속도가 빨랐다는 보고서가 있다. 고통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불구하고 자신에게 있던 ‘육체의 가시’는 치유하지 못했다. 디모데의 연약함을 고쳐주지 못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음성만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아멘.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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