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사람은 갔으나 노래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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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 밑 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작사: 정지용, 작곡: 김희갑, 노래: 이동원, 박인수). ‘향수’를 부른 테너 박인수가 2023.2.28.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우리 아들의 대학입학식(1996년) 때 들은 총장의 입학식 훈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 데 박인수 교수의 “나의 사랑 목련화야-” 했던 축가만 생각난다. 그래서 늘 좋아했었다. 그는 “서울대 음대 교수이자 오페라 가수로 평생을 살았는데 사람들은 대중가요 ‘향수’의 가수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향수’를 같이 부른 이동원도 2021년에 생을 마쳤으니 이제 작곡자, 작사자, 가수들 모두 하늘나라에 가고 노래만 남아 역사를 지키고 있다. 1989년 향수가 나오기 전에는 클래식계는 가요와 차별화하여 협연을 금기시했다. 그래서 박인수 교수가 ‘향수’를 부른 것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이동원은 1980년 대 정호승과 고은 등이 쓴 시에다 곡을 붙여 인기를 얻었다. 그는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팝 가수 존 덴버가 부른 「Perhaps Love」가 히트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성악가와 듀엣을 하고 싶어 박인수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그 후 이동원은 작곡가 김희갑을 찾아가 곡을 의뢰했고, 8개월의 작업 끝에 향수 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향수’노래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클래식을 널리 알리며 가요의 품격도 높이게 되었다. 박인수 교수는 스타로 떠올라 각종 방송에 출연하는 등 상종가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동안 클래식계는 박인수의 이런 인기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 여파로 그는 국내 최고 성악가 20명만이 될 수 있었던 국립 오페라단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되기도 했다. ‘성악가로서의 품위 손상’ 이거나 ‘지나친 상업성’ 이 이유였다. 당시 언론은 이런 클래식계를 비판했고 일반 여론도 박인수 편을 들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향수’는 국민적 사랑과 함께 음악계에서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벽을 허무는 계기를 만들었다. 노랫말인 시 ‘향수’는 정지용이 192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쓴 것이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시인의 생가 앞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고향이 있다. 많은 이들의 고향은 시골 농어촌이다. 명절 때마다 고속도로를 꽉 메운 귀성(歸省) 행렬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면, 때묻지 않은 농촌고향의 목가적 풍경들과 노인 아버지와 며느리, 딸들이 논밭을 가꾸고 소를 모는 장면들이 한 폭의 파노라마 같이 스치며 반복되는 가사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서 가슴 저 아래를 흔들어 댄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란 노래도 6.25전쟁을 치루며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들에겐 가슴 저미는 공명을 일으킨다. 세상의 고향 뿐 아니라 신앙인들이 그리워하는 하늘나라 본향(heaven/ Kingdom of God)도 그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복음성가 “실로암”을 부를 때도 마치 흑인 영가를 부르는 듯 본향을 생각하며 가슴 속이 사뭇 아리어 온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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