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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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승리한다”고 민족 각성 외쳐

‘한국의 바울이자 위대한 믿음의 선진’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특히 그중 우두머리는 원산 마르다신학교와 요코하마신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여전도사 김애신의 남편이었다.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배격하고 길선주 목사와 교회를 전복하려 했다. 

1932년은 길선주 목사가 목사로 부임해 시무한 지 25년째가 되던 해였다. 이때 길선주 목사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당시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성령의 도시 평양이 죄악의 도성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일어난 중국인 살해 사건은 인륜과 도덕을 말살한 극악무도한 만행이었으며, 길선주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은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라고 생각했다. 한국교회에 전례 없는 시련과 고통을 예견한 길선주 목사는 이 사경회에서 깨어 기도하자고 외쳤다. 

길선주 목사는 장대현교회를 사임하고 전국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평양을 떠나 전국을 다니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로 목사, 장로, 교사 800여 명이 배출됐다. 한국교회와 교육계의 지도자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세례받은 사람이 3천 명, 그가 인도한 구도자가 7만 명에 이르렀다. 그를 통해 예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왜정의 탄압이 심해져서 바라던 소망이 사라져  갈 때도 그는 “진리는 승리한다”라고 외치며 민족을 각성시켰다. 길선주 목사는 성경을 중심으로 진리를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언하기 위해 전국을 수십 번 돌았다. 

1934년 1월부터 7월까지 길선주 목사는 북간도 용정 중앙교회와 남녀 중학교 및 중국인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한 뒤, 연길 지역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함경도를 순회하면서 부흥사경회를 이어갔다. 그리고 1935년 평안북도 선천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뇌출혈로 강단에서 쓰러졌다. 그때 즉시 선천 기독병원으로 호송되어 2주간의 치료를 받고 퇴원했고, 그 후 1935년 11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평서 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25일 마지막 새벽 집회 시간에 설교하던 길선주 목사는 또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는 입을 벌렸지만 말을 못하고, 땅에 글을 썼으나 아무도 읽지 못했다. 결국 1936년 11월 26일 오전 9시 10분, 길선주 목사는 6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12월 4일 열린 길선주 목사의 장례식에는 약 10만 명의 조문객이 찾아왔다. 장례식 내내 평소 그가 자주 부르던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길선주 목사는 실로 진리의 사도요, 말세를 위한 사자였다. 그는 결국 순교적 최후를 맞았다. 그의 말세론과 내세론은 억압과 가난에서 신음하던 백성에게 소망을 주었다. 유고로는 ‘길선주 목사 설교집’이 있다.

길선주 목사의 목회는 쉬지 않고 달려온 목회였다. 1927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를 사임한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부흥사경회 요청으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복음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35년 목회를 하면서 매해 30주씩 부흥사경회를 인도했고 총 1만3천360회의 설교를 했다. 길선주 목사는 하나님을 만난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와 교회와 민족의 부흥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성경이 있었고, 그의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했다.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복음을 전해야 했던 길선주 목사는 한국의 바울이자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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