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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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노에게 제자로 택해주길 청해

김관근 전도로 정동교회 사경회 참가

아홉 살 때 첫 번 이사를 경험하고 열네 살 때 두 번째 이사를 경험하면서 몰락한 선비 가문의 경제적 극빈을 체험한 양전백은 자기 학문에 대한 불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열여덟에 집을 떠났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방랑하다 의주군 송장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학자 전서(顚西) 이정노(李挺魯)를 만났다. 이정노는 당시 문장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던 선비로 경의재(經義齋)란 사숙에서 제자를 키우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었던 양전백은 이정노를 찾아가 자신의 내력과 현실을 고했고 제자로 택해줄 것을 청했다. 이정노는 이 젊은이를 자기 문하에 받아들였고 그에게 새로운 경지의 학문을 풀이해 주었다.

그가 이정노 문하에서 학문 수련을 한 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그 경험으로 정신적인 방황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한때 흔들렸던 학문도 정리되고, 학문을 통해 세우려 했던 입신양명의 꿈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는 그에게 현실에 적응하게 했다. 그는 열아홉에 집으로 돌아와 박 씨와 결혼했다(이 여인은 후에 영신(永信)이라 이름을 고쳤다). 가정을 이룬 그는 새 현실에 적응했다. 먼저 한때 염증을 느끼고 그만둔 훈장 노릇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서(儒書)를 연구하여 사림(士林)에 명예가 점점 높아지나 가빈(家貧)을 불승(不勝)하여 훈몽(訓蒙)으로 업(業)을 하셨다.” 이정노와의 만남으로 그는 유학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다시 생겨났고, 훈장이란 직업도 부담 없이 감당하게 되었다. 이제 그도 조상의 뒤를 이어 유생이 된 셈이다.

훈장 생활을 시작한 후 3년 1892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 중 한 사람으로 만주에서 로스 목사의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의주 상인 백홍준의 사위 김관근이 그를 찾아왔다. 김관근은 1889년 봄 압록강 배 위에서 아버지 김이련과 함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교 조사가 되어 평안북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김관근이 구성 산골에 묻혀 있던 양전백을 찾아온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김관근은 양전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양전백은 외골수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김관근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그해 9월 김관근이 다시 찾아와 같이 여행을 하자고 했고, 그는 여행 경비를 보조하겠다는 김관근의 말에 경성을 관광할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전통 유학에 뜻을 둔 선비 가문의 양전백이 친구의 말 한마디에 아직 사학(邪學)으로 여겨지던 예수교를 선뜻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김관근은 전통 유학자들의 생리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 방법을 달리하여 서울 구경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김관근은 정동교회에서 열리는 장로교 전국 도(都)사경회에 양전백을 데려갔다. 이 사경회는 전국 지도급 교인 16명을 초청해 선교사들이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가르친 신앙 강습회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朝鮮耶蘇敎長老會 史記, 1928)에는 이 사경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경성(京城) 정동(貞洞)에서 전국(全國) 신자(信者)를 소집(召集)하여 일삭(一朔) 간(間) 성경(聖經)을 연구(硏究)했는데 내회자(來會者)는 16인(人)이니 경성(京城)에 서상륜(徐相崙), 홍정후(洪正厚), 의주(義州)에 한석진(韓錫晉), 송석준(宋錫俊), 구성(龜城)에 김관근(金灌根), 양전백(梁甸伯), 문화에 우종서(禹鍾瑞), 해주(海州)에 최명오(崔明悟), 장연(長淵)에 서경조(徐景祚), 자성에 김병갑(金秉甲)이 참석했으니 후래(後來) 교회 중 대단한 공헌이 있으니라.” 얼떨결에 양전백은 구성을 대표한 교인이 됐다. 양전백은 10일간 계속된 이 사경회에 체면상 이탈하지 못하고 계속 참석했고, 이 일로 초기 장로교인으로 등록됐다. 물론 그때까지 세례는 받지 않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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