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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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로 서구 문명 접하는 기회 삼아

‘밖은 기독교, 안은 유교’ 기형적 생활

그러나 이 같은 사경회 참석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게 해주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씻기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며, 기독교로 이룩된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접하는 기회가 됐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기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만은 아님을 선교사들의 생활 태도와 그들이 한국에서 하는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통해 깨달았다. 결국 양전백은 이 사경회 참석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버렸고, 오히려 기독교와 서구 문화가 지닌 우수한 점을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갖게 됐다. 그것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 서당의 교과목을 바꾼 데서 나타났다. “그 후 귀가하여 훈몽(訓蒙)으로 날을 보낼새 국문을 가르치며 성경을 겸하여 가르치고, 주일이 되면 친우 수십 명이 주일을 지키니 밖으로는 신자 같으나 안으로는 유생이었다.”

서당에서 종래에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만을 가르치던 양전백이 한글과 함께 기독교의 성경을 교육했다. 그뿐 아니라 주일마다 김관근과 친구들을 서당에 모아 예배까지 드리게 됐으니 교인이 됐다고 할 만했다. 그러나 양전백은 아직 유생이었다. 정신적인 지주는 유교였다.

비록 김관근의 인도로 기독교를 접했고, 그 종교가 이룬 우수한 문명과 문화 그리고 그 종교가 조선에서 하는 의미 있는 사업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종교적 행위를 모방은 하고 있으나, 아직 기독교가 그의 종교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밖은 기독교, 안은 유교’인 기형적인 생활이 한동안 계속됐다.

당시 마펫 선교사는 북장로회 선교 본부에 보고하면서 양전백에 대하여 “학식이 있어서 아는 것이 많고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울 정도로 으뜸이 될 것이다. 그는 이미 성경을 많이 읽었고 신앙심이 깊음으로 곧 세례를 주었다”라고 했다.

신시교회(新市敎會) 설립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구성 신시교회 설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구성군 신시교회가 성립하다. 김이련의 차남 관근이 선교사 마펫에게 복음을 받았고 부자가 같이 믿어 가까운 이들에게 전도하니 원룡수, 장응벽, 김진근, 김병갑, 양전백 등이 믿으니 당시에 예배할 처소가 없어서 모이지 못하더니 김이련이 동민과 협의하여 학당을 창설하고 양전백을 교사로 초빙하여 주일에 신자와 학생이 학당에서 예배하더니 일청전쟁에 학당이 폐지되니 회당이 없어졌다. 양전백이 자기 가사 대금 사백 냥과 이길함의 보조금 이백여 냥으로 초가 육 간을 사서 수리하고 예배당으로 사용하니 조사는 김관근이었다.”

양전백이 말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을 편찬하던 중 병을 얻어 별세했는데, 그가 편찬 실무자였던 만큼 그가 관련됐던 구성 신시교회의 창설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됐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처음 구성군에서 정착했던 천마면을 떠나 사기면(沙器面) 신시로 옮겨 그곳에서 훈장 겸 신시교회 초기 교인으로 활약했다. 그가 신시로 온 것은 김관근의 인도로 서울 사경회에 참석한 후였다.

이미 마펫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고향인 의주를 떠나 구성 신시에 정착했던 김이련, 김관근 부자는 양전백에게 집요하게 전도해 사경회에 참석하게 했을 뿐 아니라 신시에 세운 학당 교사로 초빙했고, 매 주일 학당을 교회로 이용해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앞서 양전백이 서울을 다녀온 후 학당에서 성경과 한글을 가르친 것은 신시였다. 그는 학당 선생의 자격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반 교인이 됐다. 이같이 밖은 기독교인이고 속은 유생이었던 그의 어정쩡한 상태는 1894년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산됐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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