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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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백조의 노래 ‘까치’ ②

한 영혼 소홀하지 않고 소중히 여겨

 참·사랑·성의… 희망 주며 사신 분

고아들, 말씀 양육 ‘명랑·친절·정직’  

십대 남학생 10명, 사모님의 믿음·봉사

한국 교회 100년사에 어느 40대 초기의 목사가 고아들의 형이자 어버이로, 기독교 문인 예술인들이 흠모하는 친구며 안내자, 기독교 언론의 창안 및 육성자, 어린이들의 정서를 밝혀주는 동요와 동화 작가, 명실공히 이름만 남았던 보이스카우트를 다시 살려 놓은 정열의 지도자, 한국 기독교교육 대회 총무직(이것은 처음부터 총무 자신이 모금을 하면서 끝까지 성취해야 하는 일)의 일을 거뜬히 치른 유능한 경영자… 그의 재간, 통솔력, 설득력, 온화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 전진하는 한국 교회의 비전을 한 아름 한 몸에 지닌 것 같은, 그러면서 영원한 젊음의 상징인 웃음을 죽음의 순간까지 지니고 가신 그분… 그분의 친구란 교계 연로하신 어른들로부터 각계 각층의 학자, 예술인, 실업인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들에 이르기까지였다. 그는 한 영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참과 사랑과 성의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여 희망을 주며 사신 분이다.

황광은 목사는 나의 처삼촌이면서 한편으로는 내 가까운 친구이시다. 그러기에 어떤 면으로는 남이 알지 못하는 면까지 사귀며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여기 생각나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가신 그분의 빛나는 삶을 추억해 보고자 한다. 

내가 황 목사님을 안 것은 해방 후 여러 번 공적인 모임에서 만남으로였으나, 사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여름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나는 대광고등학교의 음악 교사로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신앙으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1년에 한 번씩 캠프 생활을 시키고 있었다. 그 해 캠프는 난지도에 있는 보이스 타운 근처에서 하기로 되어 있어서, 학생들과 난생 처음 난지도를 방문하였다.

배를 타고 난지도에 닿자 그곳은 별천지였다. 당시 보이스 타운을 형성하고 있던 고아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200명이 넘는?), 길 안내를 비롯해서 외래 방문객들에 대한 인사가 너무나 친절하고 용의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무엇이나 자치적으로 움직여 나갔다. 심지어 은행까지도 자기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해 갔다. 물론 이들의 삶을 훈련시키고 기독교 신앙으로 육성해 가던 분은 황광은 목사 자신이었다. 

어떻게 고아들이 그렇게 명랑하고 친절하며 정직할 수 있을까? 하나님 말씀으로 따뜻하게 양육함을 받을 때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황 목사님으로부터 점심 초대를 받아서, 그가 거처하고 있는 집으로 갔다. 보이스 타운의 총본부이자 갓 결혼한 신혼 살림을 차려 놓은 집이다. 총본부라 해도 지금 같은 문화주택도 못되고, 그저 허름한 집에 제대로 된 가구란 눈에 띄지 않았다.

조촐한 식탁이 마련되었다. 보이스 타운 온 가족이 먹는 식사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음식이 무슨 나물을 뜯어다 끓인 것 같았는데, 음식치고는 아주 소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젊은 목사님의 신혼 생활이 이렇게 가난하게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그 음식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으로 엮어진 기도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또 맛있었다.

6.25동란이 지나고 내가 잠시 기독교 방송에 있을 때였다. 그때 황 목사님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 왔다. 난지도 일을 마치고 나오신 그분은 그 당시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였는데, 그때 난지도에서 데리고 나온 10명의 고아를 스스로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 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이 10명의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100인 위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즉, 한 명의 학생을 위해서 10명의 뜻있는 분들이 매월 얼마씩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더러 10명 중의 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물론 기쁘게 응했다.

그가 누구누구를 100명으로 지명했는지는 모르나, 내 생각에 그 편지를 받은 사람치고 ‘노우’하고 거절한 분은 한 사람도 없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그분은 누구에게나 신뢰를 받고 있었으며, 또 그를 아는 사람이면 그가 하는 일을 기쁘게 도우려 했기 때문이다. 매월 20일이 되면 10인에게 도움을 받는 학생이 직접 찾아 왔다. 물론 손에는 한 달 동안 자기가 공부해 온 기록, 살아온 삶의 기록을 엮은 노트를 갖고 찾아온다. 그 후로는 늘 그 때가 되면 그 학생을 기다리게 되었었다.

무리한 부담을 주지 않고 친구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는 바 일에 돕도록 하는 마력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일에 동참해 달라는 하나님의 일을 가져다 맡겨 준 천사의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그 후 알고 보니 황 목사 자신이 일을 시작하고 애쓰신 장본인이지만, 그 뒤에서 사모님의 수고는 말할 수 없이 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창 먹을 나이 십대의 남학생 10명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해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책가방에 넣어 주는 일, 아이들의 옷을 빨아서 다려 입히는 일 등 영육으로 오는 그 중압감을 이겨 나가신 사모님의 믿음과 봉사는 황 목사님의 것과 같이 길이 길이 빛날 하늘의 일이다.

그때 10명은 모두 장성해서 지금은 사회의 좋은 지도자들로 봉사하고 있다. 황 목사님이 거름이 되어 이 꽃들이 핀 것이다.

여러 가지 추억할 일이 있으나 모두 미루어 두고, 그분이 땅 위에 계셨던 최후의 10일간을 아는 대로 적어 보기로 한다.

1970년 7월 초순, 황 목사님께서 지니고 있던 지병인 심장병이 또 악화되었단다. 이번에는 본인이 병원보다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푹 쉬는게 좋겠다고 해서 우이동 숲에 지은 그린파크라는 고요한 산장에 가서 휴양을 취하기로 하고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때 과로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었으므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분과 함께 그린파크로 가게 되었다.

그린파크는 정말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둘러선 무성한 노송, 흘러내리는 개울물, 신선한 공기, 새소리, 매미소리로 그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황 목사는 아침이 되면 옷이나 침대 시트나 모두가 밤새 흘린 땀으로 해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기운없는 얼굴에 미소는 여전히 함박꽃처럼 가득히 피어 오르곤 하였다. 뒤쪽 베란다에는 조그만 티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연약한 몸으로 쉬지 않고 원고 정리를 계속하였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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