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주기철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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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사각오’의 정신… 주님 향한 정절 지킴이 소원

옥중서 온갖 고문 받아도 신앙 절개 굽히지 않아

경찰이 “금지해도 설교하면 체포하겠소”라고 하자 주기철 목사는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요, 체포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니, 나는 내 할 일을 하겠소” 하였다.

1940년 제4차 검속을 앞두고 산정현교회를 떠나기 전 한 설교에서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기철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했기에 일제에 의해 요주의 사찰 인물로 낙인이 찍혀 수차의 옥고를 겪은 후 결국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되었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에 대한 징벌보다는 격리에 목적이 있었던 일제 당국은 이후 재판과정을 최대한 늦추며 협박과 고문을 통한 회유에 몰두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전향을 발표하고 풀려났으며, 마지막까지 전향을 거부한 신앙인 35명은 1942년 5월 평양 지방법원 예심에 넘겨졌다. 예심 때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50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30여 명이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가혹한 옥중생활에 그의 눈과 폐와 심장이 허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오정모 사모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면회를 갔으나, 1943년부터는 사식도 받아주지 않았고 죄수들의 식사가 말이 아니었다. 

돼지 사료 같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이때부터 죽어 갔다. 그들을 우리는 순교자라 한다. 그 무렵 순교자는 모두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마침내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죽일 것을 결정하고 음식을 끊었으므로 결국 1944년 4월 21일 저녁 건강악화와 굶주림으로 4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1944년 4월, 오정모 사모가 면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간신히 의무실에서 면회했다. 뼈만 앙상한 몰골이었다. 직감으로 얼마 못 견딘다는 것을 오정모 사모는 느꼈다. 

그때 주기철 목사가 말했다. “난 더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나는 주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다 가지만 어머님께는 미안합니다.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한 불효자식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팔순이 넘은 노모를 두고 앞서가는 불효자식을 대신하여 당신이 어머님께 많이 위로하시고 봉양 잘 해주시오.” 주 목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오정모 사모와의 마지막 면회 때에 주기철 목사는 유언을 남겼는데 “첫째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로,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넷째로,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다섯째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의 조선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주시오” 하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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