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리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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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유림 류인식(1865~1928)은 안동시 예안면 삼산마을에서 태어나 민족운동의 첫 출발을 을미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될 때까지 30여 년을 오로지 국권 회복과 민족의 독립을 모색하는 데에만 불꽃처럼 일생을 살았다. 그는 격정적인 민족운동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혁신유림’으로서 고난의 여정을 걸어 나갔다. 부친 류필영으로부터는 절연 당했고, 스승 척암 김도화로부터는 파문을 당하는 곤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때를 따라 변하라(隨時變易)’는 고전을 신봉하며 유림의 개혁과 국권 회복의 혁신유림의 길을 걸었다. 또한, 1907년 일송 김동삼, 석주 이상룡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척사파 의병들이 협동학교를 습격하여 교사를 살해하는 참상을 겪는 비운도 겪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의 망명 계획은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과 관련된 것으로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안동의 혁신유림들과 협의하여 진행한 것이다. 나라를 잃었던 100여 년 전, 의리를 택하여 순국한 인물의 죽음을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 부른다. 나라가 무너질 때 가장 많은 순국자가 나온 곳이 경북이다. 전국에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인물이 90명 가량인데, 경북 출신이 18명이고 그 가운데서도 안동문화권 사람이 14명이나 된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금까지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5,689명에 달한다. 단일 지역으로 따지면 전국에서도 경상북도, 그중에서도 안동출신 독립유공자가 제일 많은 1,053명이다.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안동 임청각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며, 3대에 석주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10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식솔들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쳤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물론이고 99칸짜리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의성 김씨 집성촌 중에서도 내앞 마을이라 불리는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난 독립유공자의 수는 33명 정도로 눈에 띌 정도로 많다. 내앞 마을의 독립운동을 이끈 백하 김대락이 일가 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떠났을 때 당시 안동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김대락의 집은 ‘삼 천석 집’이라고 불리었다. 고루한 구시대 질서에 안주했으면 부귀영화를 누렸을 권세가들이었지만, 이들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였다.

한편 1919년 안동 예안 3.1운동을 주도한 혐의와 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을 시무사면당하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4차례 구금당한 이원영 목사가 있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원영 목사 생가는 한국기독교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망한 나라, 사라진 공동체 부활을 위해 저들은 불꽃처럼 살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은 우리 모두의 가족사를 대하소설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많은 지도자, 법조인 그리고 신앙인들의 자세가 정도에서 벗어나 국민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는 백척간두에 선 혼돈의 이 나라! 코로나 재난이라는 전대미문의 총체적 국가위기 앞에서도 이전투구에 몰골하는 작금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일제강점기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조국을 떠난 동포들, 이국땅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 했던 지도자들의 실천적 삶의 참모습을 3.1독립운동 102주년에 되돌아본다.

조상인 장로 (안동지내교회)

·고암경제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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