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내가 겪은 이적

Google+ LinkedIn Katalk +

1960년은 내 일생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변화가 심한 격동의 시기였다. 나는 전주 기전에서 내 신상의 변화뿐 아니라 마산의 김주열 사건과 학생들의 데모 그리고 4·19를 맞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나는 계엄령이 선포된 4월 24일 광주로 아내를 데리러 가서 전주로 이사하였다. 기독교인은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이사를 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그날이 편리해서 24일(일) 이사한 것이다. 그리고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던 날, 아내는 예수병원에 입원하고 다음 날 새벽 4시 34분에 첫 딸을 순산하였다. 아내가 전주 예수병원에서 출산하고 싶다고 기도한 대로 전주에 옮긴 이틀 후 곧바로 출산한 셈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기적을 보여 주신다는 것을 나에게 체험하게 하는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아내는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기도했던 것 이상을 예비해 주셨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왔던 전주에 두 사람이나 아는 사람을 예비해 두셨다. 하나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10여 년 만에 만난 그는 예수병원의 의사로 미리 와 있었다. 그를 우연히 학생들의 극장 단속을 나갔다가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또 한 분은 기전 여·중고의 교감 사모님이었다. 한 교장은 교감을 동사교장(同事 敎長)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교장이며 한인 교감이 앞으로 학교를 맡아 일할 사실상 교장이라는 뜻이었다. 동사교장 부인은 인사를 하고 보니 아내의 여학교 선배였다. 그래서 아내의 출산은 모든 과정이 너무 수월했었다. 그녀는 출산 후 나흘 만에 퇴원했는데 어린애를 안고 들어오자 나더러 감사기도를 하자고 했다. 옛날 같으면 너무 어색했을 기도가 그렇지 않았다. 무엇이 기도인가?

나는 기도란 무능하고 능력 없는 자가 절대자인 하나님께 매달려 소리쳐 울면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죽을 만치 자기의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용한 점쟁이 대신 하나님을 부르며 매달리는 것이 무슨 기도며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다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망상은 또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다. 

아내는 내가 광주에서 빚에 쪼들리며 매일매일 살면서 어린애의 출산은 병원에서 낳을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산파나 어머니의 구완으로 솥에 물을 끓이고 산통으로 외치며 애를 출산할 것을 상상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상상하지도 못한 도시, 전주의 예수병원에서 애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인가?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고 믿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내가 전주의 기전 여중·고에 취직하리라고 상상도 못한 때의 일이었다. 

나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인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예수의 겉옷에 손을 대 병이 나은 여인이다. 그녀는 대중 속에 끼어들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끼어들어 예수님의 겉옷에 손대어 나은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구하면 그 기도는 응답받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약 4:3) 응답받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왜 나는 부정적인 구절을 들어 늘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내처럼 그냥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된다. 응답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역 밖의 일이다.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면 된다. 

나는 내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는 영역이 이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상으로 옮겨진 것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