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경계할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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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는 현상이다. 설교자가 듣는 회중에게 ‘아멘’ 반응을 요구한다. 기도를 드릴 때에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부흥 집회 때마다 보는 현상이다. ‘믿습니다’를 크게 외친 후 기도할 것을 강사는 요구한다. 아마 감정을 고조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감정이 고조되면 더 신실한 기도가 되는 것인지 경계할 일이다. 부흥강사 중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분은 거의 못 봤다. 씁쓸하다. 찬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게 드려야 한다. 감정이 크게 고양되었다고 해서 영적이고 은혜로운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감정이 크게 고양되었지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곧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잊어버렸다. 시내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고 큰 감동으로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약속 드렸지만 금새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감람나무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겉옷을 펴서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막상 주님께서 잡히셔서 홍포를 입으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조롱과 침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실 때에는 다 도망가고 피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어떤 사람은 기도 시작 처음부터 끝까지 한 단어만 반복한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확신하기도 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무지에서 온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어디에서도 병고침을 받지 못해 가진 돈을 다 소비한 뒤에야 구원을 받았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뵈었을 때는 엎드렸다. 죽은 자 같이 되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두려워 떨었다.

교회 일을 많이 행하고 헌신하며 그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고 해서 꼭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발견된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웠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다. 진심이 아닌 외식이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왕도 하나님의 섭리에 크게 감동하여 하나님을 높여 드리며 찬양했다. 다리오 왕도 감동을 받았을 때 모든 열방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했다. 그렇다고 이 왕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마음은 자신의 이익을 좇았다. 경계할 일이다.
평생을 성도들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헌신해 온 교회 지도자들이 목회 말년에 사적인 욕심을 드러내는 모습 앞에서 우리는 슬퍼한다. 교회 구성원들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어느 중형교회에서 채무가 수 십억 원인데 세습이 불가능해지자 조기 퇴직하면서 40억 원을 퇴직금으로 받아 가는 것을 보았다. 목사 아들에게 교회 건축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위선자는 자신의 교만함, 지식과 자기 마음이 거짓됨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모른다.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시각이 없다.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나와야 한다. 바른 시각을 회복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보는 것이다. 주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영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을 즐거워한다. 거룩함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맺는 익은 열매로 판단한다. 성도들의 믿음도, 지도자들의 진정한 신앙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다. 열매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은혜가 역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주님을 향한 참된 경외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삼가 주의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일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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