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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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5남매(아들3, 딸2) 중 네 번째였으며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아버지께서는 일정 시대에 중학교를 졸업하셨으며 학구적이시고 음악을 좋아하셨고 성격도 정갈한 분이셨다. 평생을 직장 생활하시며 지각이나 결근은 하신 적이 거의 없으셨다고 한다. 영어도 독학으로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5남매(아들4, 딸1) 중 세 번째로 외동딸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셨으며 외할아버지께서 한의사로 한약방을 하시며 과수원도 경영하셔서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라셨고 일정 시대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셨다. 머리가 좋으셨으며 믿음도 좋으셨고 생활력이 누구보다 강하신 분이셨다. 

아버지께서 24세, 어머니는 20세에 결혼을 하시고 다음 해에 나를 낳으셨다. 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보다 오직 아버지에게 의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일정 시대 말년에 서울에 있는 경성대학(현재 서울문리대) 서무과 직원으로 계셨을 때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이 점점 심해져 가기 때문에 도시를 피하시려고 외갓집 근처 강원도 원통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하셨다. 1년 후 일본이 항복하고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갈리게 되어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이 다스리게 되었다. 인제와 원통이 38도선 북쪽이어서 소련군이 들어오고 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부모님께서는 공산 치하에서 살 수 없다고 11월에 우리를 데리고 빈 몸으로 38선을 넘어 고향인 춘천으로 왔다. 큰아버지 집에서 몇 날을 보내고 우두동에 부엌도 없는 초가집 작은 방에서 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약 1개월 후 1946년 1월 1일 어머니께서 다섯째 동생을 해산하였다. 

친가 친척들이 가까이 계셨으나 딸을 낳았다고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어, 초등학교 5학년인 나와 나의 바로 밑 3학년인 동생과 같이 어머니를 도와 드려야만 했었다. 그때의 고생스러웠던 아픔! 평생 동안 가시지를 않았다. 

일곱 식구가 살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직장을 구하러 다니시다가 미군 부대를 찾아가셨다고 한다. 해방 직후 영어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바로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셨으나 월급이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런 가난 속에서 아버지께서 일본 사람들이 살던 적산가옥을 구했는데 일본 집이라서 그리 좋지는 않았어도 방이 셋, 부엌, 목욕탕, 화장실이 있어 우리 가족에게는 대궐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춘천남자중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취직이 되셨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었다.  

5년 후 생각지도 못했던 6.25전쟁이 일어났다. 우리는 피난길에 나섰는데 산길로 걸어서 여주 가까이 갔었으나 인민군들의 탱크가 우리보다 먼저 도로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가던 길을 포기하고 두메산골 홍천 모곡으로 갔다.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여 피난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민군들이 약 15세쯤 된 남녀 누구나 의용군으로 끌고 가려고 해서 아버지와 나와 바로 아래 동생은 낮에는 산속 머루 덩굴 속에서 숨어 있었는데 불개미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저자소개] 약력:1934년 출생. 1993년 남가좌교회 권사취임. 사단법인 한국화술교육원 이사, 덕명의숙 노인대학 이사직을 역임했으며 국제미술대전 우수상(사군자), 제2회 유집상 장려상(전도)을 수상했다. 전 육사교수, 수도공전 교장직을 역임하고 본보에서 10년간(1990-2000) 편집국장을 지낸 원익환 장로의 사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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