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춘원의 파란만장한 58년 인생 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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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감옥에서 춘원은 운명적인 ‘도쿠도미 소고’의 회유를 받게 된다. 정말 보아서는 안될 1급 비밀문서를 도쿠도미로부터 보게 된다. 이대로라면 우리 조선 청년 지도자들은 다 죽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살생부 블랙리스트는 너무나 소름끼치고 섬뜩했다.

자신만이 일본의 개가 되어 준다면, 우리 조선의 젊은 지도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뭐라고 한들, 자신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춘원은 며칠간 고민 끝에 결국 결심하고 친일 변절, 일본의 주구가 되었다.

일본 천황에서 충성하고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긍지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일본 당국에 제출했다. 이후 춘원은 본격적으로, 아니 노골적으로 친일에 나섰다. 이때의 수양동우회는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로 흥사단의 자매 단체이며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등에 의해 결성되었는데 얼마 후 이 수양동우회가 결국 사건에 연루되어 문제가 터졌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많은 애국자들이 체포, 구속되어 ‘수양동우회’는 결국 힘없이 해체되었다. 수양을 목적으로 내세운 동우회가 기관지 ‘동광’을 발행하면서 점차 ‘신조선 건설’ 등 독립운동 성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춘원은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했으며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수많은 친일단체 활동에 연이어 참여했다.

또 춘원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노골적으로 지지했으며 징병제, 징용제 실시를 환영하는 기고, 강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춘원은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으며 1943년 11월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에 참여해 유학생들의 입대를 노골적으로 권유했다.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 재선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11월 ‘대동아문학자대회’에도 참석했다. 그야말로 친일 변절, 철저한 일본의 주구가 되어 활동했다. 그러면서 춘원은 틈만 나면 도쿠도미를 찾아가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켜줄 것을 확인하곤 했다. 이때부터 춘원이 도쿠도미를 찾는 시간보다 도쿠도미가 춘원을 찾은 시간이 더 많았다.

도쿠도미는 자주 춘원을 찾아 와서 지금의 국제 정세와 한일 정치 상황을 놓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등 춘원과의 관계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춘원이 더 열심히 일본을 위해 일해주는 것보다 뒷날의 자신의 영일을 생각하며 일할 것도 주문했다. 때론 인간적인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며 지금의 국제 정세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춘원을 찾아 와, 더욱 예사롭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춘원! 지금 국제 정세가 아주 좋지 않아. 어쩌면 우리 일본이 모든 걸 포기할지도 몰라.” 도쿠도미는 의자에 앉자마자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선생님, 일본이 모든 걸 포기할지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춘원도 덩달아 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아!” 도쿠도미의 양 어깨가 축 늘어지면서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선생님! 일본이 항복이라니?” 

춘원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도쿠도미를 쳐다봤다. “내 오늘 자네에게 이 말 해 주려고 일부러 시간을 냈네. 어쩌면 자네와의 만남이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도쿠도미의 눈시울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이 말대로 그 후, 도쿠도미의 모습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도쿠도미의 말처럼 얼마 못 가, 일본은 항복하고 이 땅에는 해방이라는 뜻하지 않은 선물이 찾아왔다. 춘원은 도쿠도미가 왔다간 후,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하고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남양주 ‘사릉’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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