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내 딸아! 살면서 외롭고 괴로울 땐, 이 찬송가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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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수염 청년은 또박또박 조리있게 따져 물었다. 나머지 청년들도 숨을 죽이며 춘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들의 충혈된 눈빛이 모두 살아서 생동하고 있었다. 이 청년들을 보니, 이 나라 조선의 앞길에 새로운 희망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이 젊은 청년들을 앞에 두고 있는 춘원은 지금 마음에 큰 감동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춘원은 천천히, 그러면서 조목조목 알기 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춘원은 먼저 민족의식 개조의 요체, 8개 항목에 대해 설명했다.

1. 거짓말 추방 2. 공론(空論) 추방 3. 신의(信義) 4. 개혁의지 5. 공사(公私)구분 6. 전문기술 개발 7. 경제적 독립 8. 위생과 건강 등 이것이 우리 한민족의 가장 큰 문제점임을 설명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이 민족을 일본의 식민통치로 전락케한 요인임을 설명했다. “힘을 먼저 길러야 합니다. 아무리 독립을 하고자 해도 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뭐라고 했습니까? 도산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 않아요? ‘도덕적으로 타락한 나라는 결코 희망이 없다’라고…. 우리는 조선은 전면적으로 개조돼야 합니다. 개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우리가 우리의 계획을 다 털어 놓고 일제와 노골적으로 정면으로 맞선다면, 놈들이 우리를 잘 하라고 가만히, 조용히 놔둘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서히, 묵묵히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독립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민족개조론’은 이런 뜻입니다.”

춘원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일행을 주욱 훑어 보았다. 다른 청년이 침묵을 깨고 질문했다. “선생님의 친일은 결국은 독립을 위한 하나의 작전이라는 뜻이지요?” “말하자면 그렇소.” 춘원은 힘주어 대답했다. 또 다른 청년이 물었다.

“제시된 8개 항목을 가장 효율적으로 국민을 계몽시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배운 사람들이 앞장서서 모든 가능한 매체들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분노하며 흉기를 들고 이 집에 난입했던 청년들이 순한 양이 되어 이젠 한 몸이 되어 지금 나라를 함께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리더 턱수염이 다시 나서서 오늘의 토론을 멋지게 마무리 하고 있었다. “선생님! 잘 알았습니다. 오늘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희들은 돌아가겠습니다. 앞으로 나라를 위해 계속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안녕히 계세요.”

이렇게 하고 청년들은 모두 꾸벅 인사까지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춘원은 이후, 청년들에게 그 당시 패기있게 했던 말처럼, 청년들이 바랐던 독립운동의 투사로 여생을 살지 못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보면 춘원의 생애는 정말 파란만장했다. 그는 1892년 평안도 정주의 소작농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0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이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고, 일본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서울로 상경했다. 이듬해 일진회 추천으로 도일, 1907년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본 동경 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후 기독교 성경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청교도적인 생활을 지향한다.

1910년 일본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이후 1917년 1월부터 한국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해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다.

2년 후, 춘원은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해 임시정부의 주간지였던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하면서 이나라 독립운동에 크게 헌신한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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