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유창하지는 못해도 깨끗한 영어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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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17년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잠시 미국에 다녀와서 40대 후반에 대전 목원대학 영문과에 부임 직후인 1987년, 젊은 미국인 교수가 본교 영문과 여학생 졸업생과 결혼하면서 결혼예식의 주례를 부탁해 왔다. 아무래도 나의 영어가 미숙하거니와 미국에서는 목사가 결혼주례를 하는 것이 상례(常例)이므로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박봉배(朴奉培, 1931~2021) 총장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 영어구사력이 훌륭한 분이니 그분에게 주례를 부탁하도록 새신랑에게 종용했었다. 

결혼 당사자인 미국인 교수는 자기 자신이 총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는 점과 또 문 장로가 장로교회의 장로로 안수를 받았으므로 교단에서 안수 받은 목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난생 처음 외국인 결혼예식의 주례를 맡게 되었다.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하였으므로 각각의 순서와 주례사의 일부를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하였다. 결혼예식의 절차를 꼼꼼하게 준비한 덕분에 첫 번째 결혼주례의 임무를 대과(大過)없이 마칠 수가 있었다.

그 이후 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서양인(미국인과 캐나다인) 교수들이 한국여성과 결혼을 하는 경우에는 문 장로를 찾아오는 것이 이상한 관행이 되어 지금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 재직 중에 다섯 쌍, 퇴임 이후에 세 쌍 등, 모두 여덟 쌍의 외국인 주례를 맡았던 셈이 된다. 한번은 영문학과에서 졸업한 한 여학생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국인 장교와 결혼을 하게 되어 주례를 맡게 되었는데 결혼 직전에 예비 신랑신부를 면담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미국인 장교인 새 신랑이 주례자를 면담하는 동안 표정이 굳어 있었고 주례자가 묻는 말에 “Yes, sir!” 혹은 “No, sir!” 정도로 짧게 대답을 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혹시 이 두 사람이 내게 오기 직전에 서로 다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져보게 되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부에게서 다시 인사하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신랑은 부대 근무로 인해서 오지 못하고 새색시가 친정언니와 함께 찾아 왔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새색시에게 물었다. “지난번 신랑과 신부가 주례자를 면담했을 때, 혹시 내게 오기 직전에 두 사람이 다툰 일이 있었나?” “(정색을 하면서) 아닌데요.” “그런데 그날 왜 신랑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고 내가 묻는 말에는 간단한 대답만으로 일관했는지?” 내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자매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영어는 비속어(卑俗語)가 없는 깨끗한 영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은 군인의 신분이므로 평소 부대에서 비속어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버릇이 있어 혹시 주례 앞에서 실수를 할 것 같아 퍽 조심을 하였다네요.”

신부의 대답은 사실상 매우 뜻밖이었다. 그리고 보니 내가 젊은 시절 최전방에서 군대생활 할 때, 흔히 많은 고참병들이 말끝마다 “쌍시옷”을 입에 달고 살던 군부대내에서의 ‘비속어 문화’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학보병(學保兵)으로 입대하여 1년 반 동안 일등병으로 근무하다보니 나보다 졸병이 없어서 고참병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비속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회고하면서 혼자서 빙긋이 웃을 때가 있다. 

잠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웃에 부모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던 독일계 미국인 할머니가 계셨다. 그 댁에서 처음 식사를 하던 날, 할머니께서는 “대부분의 외국 학생들이 미국에 처음 와서는 깨끗한 영어를 말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대부분 ‘비속어’가 자주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문군(文君)은 앞으로 공부마치고 미국을 떠날 때까지 지금처럼 ‘깨끗한 영어’를 말하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설령 ‘목표언어(target language)’에 서투르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가 깨끗한 말이면 깨끗한 말 자체가 ‘모국어 화자(native speaker)’를 압도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감히 힘주어 권면한다. “유창하지는 못해도 깨끗한 영어를 말하라.”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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