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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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되던 때의 일화이다. 문학소년 야나모도 마사오(柳本正雄)는 1941년 진주만 공습 때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國語시간에 일본말 ‘가나’를 배웠고, 도화(圖畫)시간 첫 과제는 ‘일장기’ 그리기였다.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진주만 공습 기념일)인 매월 8일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 신사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갔다. 학교 정문을 지나면 독농가(篤農家) 니노미야(二宮尊德)의 동상이 있었다. 학생들은 등교 때마다 그 동상을 향해 절을 하고 지나갔다.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어디에 있든지 일어나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를 했다. 운동장에서 열리는 전교생 조회 때는 제일 먼저 동쪽을 향해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했다. 그리고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맹세)’를 일제히 큰소리로 외웠다.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징병, 징용나간 젊은이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학생들은 수시로 보리 베기, 모심기, 벼 베기, 보리 밟기에 동원되었다. 여름철엔 등교 때마다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베어가야 했다. 1945년, 5학년이 되던 해에는 하루걸러 하루씩 수업을 전폐하고 송근유(松根油)를 얻기 위해 솔뿌리를 캐러 다녔다. 턱없이 부족한 수업 시수를 보충하느라 여름방학도 없어졌다. 미국이 신형폭탄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한 후로는 상급생들이 총동원되어 학교 측백나무 울타리 밖에다 방공호를 팠다. 8월 16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평소보다 늦게 조회가 열렸다. 단상에 오른 아마기(天城) 교장은 “전쟁이 끝났고 이제 방공호 파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훈화했다. 그러곤 “나의 본래 성이 아마기가 아니라 조(趙) 씨이니 이제부터는 조 교장선생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조회가 끝난 후 교실에서는 ‘기이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들어와 칠판에 커다랗게 ‘李種煥’이라고 쓰더니 ‘이종환’이라고 읽고 나서 이것이 나의 이름이니 그리 알라고 했다. 그러고는 각자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대라고 했다. 돌아가며 출석부 순서대로 자기의 본래 성명을 밝혔다. 그날 이후 야나모도 마사오는 유종호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훗날 문학평론가가 된 유종호 교수는 “이렇게 기이한 이름찾기가 해방 이후 우리가 치른 첫 의식이었다”고 기억했다. 일본의 패전소식은 8월 15일 정오 일본,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일본의 점령지 전역에서 방송된 일왕의 육성방송, 소위 ‘옥음(玉音)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우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중, 소 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당시 조선에 등록된 라디오는 약 33만 대(조선인 20만 대)에 불과했고, 한낮이어서 이 방송을 청취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4분 37초동안 진행된 일왕의 육성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난해한 한문투 문장은 일본인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왕의 육성방송 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낭독했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또 한번 읽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반복해서 들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815자의 ‘종전 조서’ 어느 곳에도 ‘패전’, ‘항복’, ‘해방’, ‘독립’ 같은 명시적 단어는 없었다. 그것이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일왕이 수락하기로 한 ‘4국 공동선언’ 즉 포츠담 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제13조)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포츠담 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일왕의 처연한 목소리와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등 몇몇 구절을 통해 이제 전쟁이 끝났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였다. 해방 당일은 모두 어리둥절해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해방의 환희에 젖은 만세 인파가 본격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은 16일 오전부터였다. 16일 10시에 서대문 형무소 등 전국에서 정치범 1천명이 석방되기도 했다. 이것이 광복절 당일의 모습이었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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