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인생의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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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차여행과 같다. 어느 낯선 정거장에서 인생의 여행은 시작된다. 부모님이 티켓을 끊어주셨다. 아무 것도 모르고 올라탄 나를 태우고 기차는 그렇게 출발한다. 어떤 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한적한 간이역(簡易驛)도 있다. 역을 지날 때마다 제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고 내린다. 그 수많은 사연들을 뒤로 한 채, 기차는 또 다음 역을 향해 경적을 울린다. 

내가 기차에 오를 땐 부모님이 동승하셨다. 처음엔 부모님이 항상 나와 함께 여행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모님 중 한 분이 갑자기 기차에서 내린다. 미처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이 홀연히 떠나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차는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린다. 

잠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이 남은 한 분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다. 발을 동동 굴러보지만 이미 하차하신 부모님의 모습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우리 가족 중에서 세상에 남은 것은 나 혼자다. 부모님이 떠난 빈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채워준다.

때로는 형제의 이름으로, 친구의 신분으로, 자녀의 자격으로 자리를 메꿔준다. 그렇게 나를 태운 인생의 기차는 수많은 승객들을 싣고 계속해서 어디론가 달린다. 내 인생의 기차 여행에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절망, 만남과 이별이 늘 동승(同乘)한다. 그러다가 불현듯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언제 어느 역에서 내렸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 아쉬움과 공허함을 남기고 새로운 사람들을 실은 기차는 또 다음 도착지를 향해 달린다. 

인생이라는 기차에 홀로 남은 나는 문득 이런 상념에 잠긴다. 좋은 기차 여행이란 무엇일까? 내가 내릴 역은 어디쯤에 있을까? 그때까지 이 여행을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다음 역에서 내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다음 역에서 내가 내릴지도 모른다. 한 번 내리면 다시 올라탈 수 없기에 내리기 전에 마음을 잘 다잡아야 한다. 지금 나와 동행하는 여행객들과 잘 지내야 한다. 기왕이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며 베풀어야 한다. 내가 있어서 그들의 여행이 쾌적하고 편안하도록 정성을 들여야 한다. 다음 역에서 누가 내릴지 모르는데 왜 헐뜯고,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이 인생의 기차에서 내려야 한다. 어느 역에선가 내가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동승한 이들과 아름다운 작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탄 칸에 동승한 소중한 인연들에게 내리기 전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마웠다고! 당신이 있어서 내 여행이 참 즐거웠다고! 나와 함께 해 주어서 무척 행복했노라고! 가시는 그 곳까지 부디 행복한 여정(旅程)이 되시라고! 내 인생의 기차 여행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여기의 마지막 문장이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의 명시 《귀천(歸天)》을 떠올리게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천재이면서 동시에 바보 시인이었다. 1950년대 당시, 수재가 아니면 감히 입학원서도 내볼 수 없는 서울대 상대(商大) 4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휴학도 아니고 자퇴를 하였으니! 그의 자퇴이유가 이러했다. ‘앞으로 자신은 시인(詩人)으로 살 것이므로 「상대 졸업장」은 필요치 않다고!’ 주머니에 용돈이 없어 친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5백 원, 천 원씩 받아썼던 돈이 어처구니없게도 북한의 공작금(工作金)이라고 정보기관이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그는 전기고문(電氣拷問)으로 심신이 심하게 병들어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필적으로 남긴 “천상병의 《시작(詩作)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는 고독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음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이시다. 나는 고독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신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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