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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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영암교회의 목회 ①

말씀, 어린이들 마음 사로잡아

설교로 많은 이들 큰 감동 전해

항상 차분․침착하고 웃는 얼굴

어린 소녀들 뽑아 무용부 조직

영암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며 대광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이도명 장로는 어린이들을 사랑하던 황광은 목사에 대하여, 그리고 영암교회 당회장이었던 황광은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황광은 목사와 고향이 같은 이도명 장로는 황 목사보다 늦게 월남하여 잠시 동안 황 목사의 집에 머문 일이 있었다.

그 후 6·25전쟁과 피난 생활과 서울 수복 및 5·16혁명 등 혼란한 시대를 소식을 모른 채 지내다가 정말 뜻하지 않게 극적으로 황광은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대광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하면서 학교 옆 신설동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는데,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영암교회가 있었고, 황광은 목사는 그 교회 당회장으로 계시는 것이었다.

기독교 학교인 대광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황광은 목사는 대광초등학교에 오셔서 어린이 설교를 담당해 주셨다. 어린이 설교자가 많이 없었던 그 시절에 황광은 목사는 늘 어린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의 말씀은 언제나 어린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800여 명 대광초등학생들의 모습은 참으로 천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황 목사는 이 아름다운 모습이 좋아서 피곤에 지쳐 숨을 몰아 쉬면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대광학교 강당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어린이 성가대의 찬양이 끝나고 황광은 목사가 강단에서 말씀하기 시작하면 재잘재잘 떠들던 어린이들도 어느새 그의 말씀에 끌려들어 조용해지곤 했다.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지게 했던 황 목사의 설교는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과 학부모들까지도 큰 감동을 받게 하였다. 요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 때 왜 그 설교들을 녹음해 두지 못했었나 하는 아쉬움이다.

목회 프로그램

1967년 내가 영암교회 장로로 장립되면서 황광은 목사와 나는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목회 스타일은 한 마디로 역동적이었고 진취적이었다. 그의 모습은 항상 차분하고 침착하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그 당시 다른 교회에서는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황 목사는 하였다. 교회 안에 소년단을 창설한 일이라든지, 생활 학교를 개설해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교우들의 생활을 더욱 보람있게 이끌어준 일 등은 그런 면을 말해 준다. 교회 어린이들은 자칫 얌전하고 소극적으로만 양육되기 쉬운 당시의 현실 상황에서 영암 소년단은 활동적이면서도 봉사활동을 통해서 늠름하고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대자연 속에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야외 캠핑을 통해서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며, 꼬리가 아니고 머리가 되는 지도자의 자질을 길러가게 되었다. 우리 집의 세 아들도 영암 소년단으로 자라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나도 영암 소년단의 육성 후원자가 되었던 것을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

황 목사님이 가신 후 그의 장례식에서 그가 길러 놓은 소년단원들이 장내 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는 그가 일찍 가신 일이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되었다.

황광은 목사는 교회학교 어린이 교육에도 남다른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바쁜 중에도 자주 교회학교를 방문하였고, 친히 설교를 담당해 주기도 하였다. 교회 안의 어린 소녀들을 뽑아서 무용부를 조직한 일도 특이한 일이었다. 그는 예술을 통해서 주 예수의 모습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발표회 때마다 믿지 않는 학부모까지 교회로 불러모을 수 있었으니 선교의 효과도 대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광은 목사의 목회 프로그램에 의해 한 발 앞서가는 영암교회의 모습은 ‘영암 생활학교’의 개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결같이 가난하던 그 당시에는 삶의 지혜가 더욱 필요한 때였는데,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영암 생활학교에는 다음과 같은 과목들이 있었다. ‘어린이 생활지도, ‘꽃꽂이’, ‘요리하는 기술’, ‘사진 기술’, ‘화초기르기’, ‘양계‘, ’뜨개질’ 등 주로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교양 과목들이었다.

영암교회에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많았고, 특히 대학교 교사들이 많이 출석하였다. 때문에 특별한 강사는 외부에서 모셔왔지만, 대부분 교회 안에서 자원봉사자로 교사들이 일했다. 10주간의 교육 기간 동안 강사와 수강생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공부했고 정이 들었으며, 따라서 자연히 성도의 교제는 날로 두터워졌다.

또한 전 교인 운동회를 열어서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친교를 도모하는 동시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농촌 교회 돕기 바자회를 열기도 했다. 각 가정에서는 일용품과 옷가지 등을 몇 점씩 기쁘게 내놓았고, 음식부에서는 김밥, 떡, 만두, 국수, 도너츠, 강냉이, 식혜, 과일 등을 만들어 제공하여 마치 큰 잔치를 하는 것과 같았다.

영암교회 당회의 모습은 항상 따뜻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였다. 어떤 결정 과정에서 당회원 사이에 의견이 상충될 때는 황 목사가 나서서 ‘좀더 기도해 봅시다’ 하시며 언제나 민주적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영암교회 당회는 언제나 웃음으로 시작되고 웃음으로 끝났다.

황광은 목사는 언제나 교회에 대하여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는 교회 외의 기독교 기관에 관여하는 곳이 많고 늘 바빠서 교회를 잘 섬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자기는 영암교회의 적임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며, 보다 더 좋은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회는 교계의 여러 기관에서 황 목사님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일도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니 마음놓고 나가서 일하시라고 권고하곤 하였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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