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밥 푸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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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범한 아낙네의 다음 글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친정에 가면 어머니는 꼭 밥을 먹여 보내곤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친정에 가면 부엌에도 못 들어오게 하셨고 5남매의 맏이라 그러셨는지 남동생이나 당신보다 항상 내 밥을 먼저 퍼주시곤 하셨다.

어느 날 오랜만에 친정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푼 밥을 받아 내 앞에 놓자, 어머니가 “얘, 그거 내 밥이다.”하시는 것이었다. 민망한 마음에 “엄마 웬일이유? 늘 내 밥을 먼저 퍼주시더니…”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아니고, 누가 그러더라. 밥 푸는 순서대로 죽는다고. 아무래도 내가 먼저 죽어야 안 되것냐?” 그 뒤로 어머니는 늘 당신 밥부터 푸셨다. 그리고 그 이듬 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그 얘기를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남편과 나, 둘 중에 누구 밥을 먼저 풀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남편 밥을 먼저 푸기로 했다.

홀아비 3년에 ‘이[蝨=이 슬]’가 서 말이고, 과부 3년에는 ‘깨’가 서 말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뒷바라지 해주는 아내 없는 남편은 한없이 처량할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달랑 딸 하나 있는데 딸아이가 친정아버지를 모시려면 무척 힘들 것이다. 만에 하나, 남편이 아프면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내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더 오래 살아서 남편을 끝까지 보살펴 주고 나서 남편을 뒤 따라 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 줄곧 남편 밥을 먼저 푸고 있다. 이 사실을 남편은 물론 모른다. 혹, 알게 되면 남편은 내 밥부터 푸라고 할까? 남편도 내 생각과 같을까? 바라기는 우리 두 사람, 늙도록 의좋게 살다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내가 따라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어느 집이나 연세가 높으신 어른의 ‘진지(밥)’를 먼저 퍼서 올리는 것을 기본적인 도리로 여겨왔다. 이는 어른 공경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른바, 삼강오륜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 토속적인 미신의 해석이 가미되어 그것이 “죽는 순서”로 둔갑을 한 것이다. 사실인 즉, 조금 지나친 착상이라고 본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33인 중에는 손병희 선생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인 15인, 이승훈 선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개신교)인 16명, 한용운 선생으로 대표되는 불교인 2명이 들어있음을 본다. 그런데 이들이 서명하는 과정에서 서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올리기 위해 설전(舌戰)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때, 이승훈 선생의 한 마디가 열띤 분위기를 가라앉혔으니 그 말의 내용인 즉슨, “이건 죽는 순서인데 이름이 앞에 들거나 뒤에 들거나 무슨 상관이겠소!” 그러고는 천도교를 대표한 손병희 선생에게 먼저 쓰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우리 말 중에 자신의 ‘강한 결단’을 표현하는 어휘를 떠올려 본다. 그 중에 ‘맹세코!’ ‘결단코!’ ‘한사코!‘ 등등의 어휘가 있다. 글자의 뜻으로 보아서 가장 강력한 의지가 내포된 표현을 고르라면 “한사(限死)코”라고 본다. 그 자의(字義)가 “죽기를 한(限)하고”의 뜻이기 때문이다. “맹세”나 “결단”은 인간의 자의(自意)로 바꿀 수도 있고 뛰어 넘을 수도 있지만 “죽음”은 인간이 마음대로 변경할 수도, 뛰어 넘을 수도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경(히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마치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땅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내일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죽을 때 후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라고 한다. 왜일까? ‘죽음’이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자신의 육체’가 별 것 아닌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후회 없는 죽음, 곧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 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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