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4)   

Google+ LinkedIn Katalk +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자상한 아버지, 인자한 거장 ②

만나자는 사람들 늘 많아 바쁘게 지내

받은 원고료  봉투째 그대로 도움 줘

이용 당할지라도 도움 주는것에 기쁨

가진것 없어도 희망 가지면 행복 느껴

어느 날의 가정에서의 모습을 김유선 여사의 추억에 의거해 더듬어본다.

저녁에 집에 들어서는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어서 마치 무슨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항상 몸이 쇠약했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하곤 했다. 그래서 그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드리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 첫 인사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면 그는 그날 하루 지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곤 했다.

누구를 만났다느니, 무슨 일을 했다느니, 그리고 시온다방에 들렀더니 ‘황 목사, 나 5분만’, ‘나 잠깐만’ 하면서 만나자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참 바빴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김 여사는 곧잘 빈정대곤 했다.

“여보, 인생 복덕방 하나 차리면 좋겠소. 종로 2가에 말이오.”

그러면 그는 슬쩍 다른 말을 꺼내기도 했다.

“참, 오늘 사무실에 동윤이가 찾아 왔었소. 살고 있는 판자집이 헐린다지 않겠소. 그런데 부인이 아기 나올 달이 가까웠다는군요. 마침 원고료 받은 것이 있길래 그것을 주어 보냈소.”

“얼마나 되는데요?”

“몰라. 얼만지, 봉투를 열어 보지 않았으니까.”

“그 자식 정말 너무하네! 우리 집에도 왔었거든요. 당신한테는 몇 시에 찾아갔어요?”

“점심 때쯤이던가…?”

“우리 집에 온 것이 두 시경이니까 당신한테 들렀다가 곧바로 내게 온 것이 분명하군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하도 딱하길래 쌀과 옷가지를 이것저것 꾸려 주고 점심 먹여서 보냈는 걸요. 아무리 그렇기로소니 어떻게 같은 날 양쪽으로 들린단 말이오. 다시는 속지 않겠소.”

“여보, 다 잘해 놓고 그러지 마우. 우리 실컷 이용 당합시다. 얼마나 좋소? 일본의 누구는 ‘오오이니 약까이나 나레(실컷 이용당해라)’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정말 좋소. 가능하면 그렇게 살고 싶구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지 마오. 당신이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고 잘 쓰면 일이 생각지도 않게 슬슬 잘 풀리더라. 그런데 이상하우. 당신이 깍쟁이 부리면 바깥일이 비비 꼬이는 걸 경험해요.”

그러면 김 여사는 더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집에 찾아오는 젊은이들 중에는 어려운 문제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가 돌아간 후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가곤 했다.

“여보, 가능하지 못한 일이면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지 기대를 가지게 해 놓고 나중에 실망을 주지 말우.”

“나까지 안 된다는 말을 했다면 아마 그 젊은이는 자리에서 일어설 힘조차 없었을 것이오. 우선 희망을 주어서 살려 놓고, 그 다음에는 노력해 볼 노릇이지.”

“그런 일만 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겠네.”

“황광은의 생명은 바로 그것이오. 남의 일 협력하는 것 빼놓으면, 내 생명은 없어지고 마오. 나는 희망만 있으면 살 수 있어요. 나는 집 없고, 돈지갑 없고, 명함 없고 이런 건 다 없어도 희망만 가지면 행복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 뒤에는 김 여사는 그 누구보다도 황 목사의 주일 설교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며 뜨거운 감동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정말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이상이, 차원이, 삶의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아내라는 내가 이 현실 세계로, 가정으로, 한 남편으로, 자꾸자꾸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의 정신과 이상 그리고 그의 신앙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황 목사 가정의 오락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녹음기를 가지고 노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아나운서가 되어 아이들에게 노래도 시키고, 대담도 하고, 옛날 이야기도 들려주고, 성경 퀴즈 놀이도 했다. 손님을 초대했을 때 식사 후면 녹음 취입을 했었는데, 영암교회 당회원들과의 대담, 소년단 직원들과의 즐거운 한 때, 친척들과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리고 친구들 가족들과 어울려 함께 지내던 즐거운 한 때의 모습과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인생열차 차장’ 흉내를 내며 풍자적으로 독백한 대목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멋진 것이다. 그것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본인은 사바(娑婆) 역을 떠나서 천성으로 향하는 인생열차 차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인생 행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 안내의 말씀과 아울러 손님의 질문에 대답해 보고자 합니다.

이 열차는 사바역을 떠나서 아동역에 이르게 됩니다. 아동역에서는 무엇보다 아동들이 주의 해야 합니다. 아동들은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말고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아동역을 지나면 소년역이 가까워 옵니다. 소년역에서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시절이라고 해서 실컷 노는 일이 소년역에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밖을 멍청하니 내다보는 것보다 한 자라도 더 배우기 위해 독서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음은 청년역입니다. 청년역에 다다르게 되면 밤 열차의 모든 커텐이 늘여지게 될 것입니다. 청년역을 통과할 때는 밖에서 날아드는 몹쓸 연기에 눈을 상하기 쉬우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밖에서 ‘사이소! 사이소!’ 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더라도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주의하기 바랍니다. 만일에 문을 열고 재미보다가는 청년 주머니에 돈 붙어 있을 날 없고 아까운 세월이 허송되게 마련입니다. 기차가 떠날 때 내린다는 말 하시지 않기 바랍니다.

다음은 장년역입니다. 높은 언덕에 오르느라고 숨이 가쁘던 차는 잠깐 숨을 돌리느라고 거기서 쉬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하실 것은 그 바로 내리막부터가 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변 보러 밖에 나간다든가, 문을 열어 제치고 머리를 내밀고서 잠을 청한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위험하기 짝없는 일입니다. 내리막 터널에 시커먼 암흑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입니다. 얼마 안 가서 노인역을 통과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포인트도 많고 길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많이 흔들거릴 것입니다. 지팡이가 있으면 미리 준비하셔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 그 다음이 천성역, 곧 종착역입니다. 거기에서는 표를 조사하게 됩니다. 차표가 있습니까? 없어요? 에이 여보시오. 표도 없이 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기 지옥으로 떨어지시오. 또 누가 표가 없습니까? 표는 있는데 짐이 없어졌다구요? 여보세요. 지금 돌아가서 언제 짐을 가져온단 말인가요. 저기 음부에나 가서 기다리란 말씀이오! 자, 노인들이여, 조심하십시오. 까딱하면 깨어집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