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와 학교·교회 어우러진 복음 전초기지 구축
북장로교선교부 址 ① (연지동 136번지)
연지동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장로교선교부가 차지한 터가 약 2만3천여 평에 이르는 넓은 면적이다. 앞서 찾아보았던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를 포함해서 효제동과 연건동까지 선교사들이 주거지와 업무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사역을 했던 이곳은 당시 양관(洋館)마을이라고 불렸던 선교사들의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서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역사를 보존하려는 의지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개발의 당위성과 경제논리는 모든 흔적을 없애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남겨준 재산을 한국교회는 어떻게 관리해야 했는지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상당히 넓은 이 지역에서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건물이 없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하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남겨주고 떠난 선교사들에 대한 무책임이라고 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곳에는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을 비롯해서 여러 기독교 기관들의 건물이 있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정동에서 연지동으로 옮기는 것은 덕수궁의 확장이라는 당시 조선정부의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동의 활동공간이 협소하던 차에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선교사들의 주택들이 편입되었다. 따라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옹색하게 되었기 때문에 1894년부터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종로의 연지동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02년에 들어와서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결정으로 정동의 거점을 완전히 양도하고 연지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결국 1903년 연지동 136번지 일대의 2만3천여 평을 구입해 선교사들의 주택을 건축했다. 이렇게 해서 연지동은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거점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동을 떠난 다음에 자리를 잡은 이곳은 정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울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회 선교사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즉 가족이 함께 있는 선교사들은 연동교회 남쪽과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편에 있는 주택에 살았고, 독신으로 활동하는 여자 선교사들은 정신여학교 뒤쪽에 있는 주택에 살았다.
수십 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살았고, 선교부 사무실과 정신여학교, 경신학교 등이 한 곳에 모여 있던 곳이 여기 연지동 136번지를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이다.
이곳에는 학교와 선교사들이 지은 양옥(洋屋)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옥 또는 양관마을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이곳은 숲이 울창했고 그 사이사이에 양옥들이 자리했으며, 예배당과 두 개의 학교가 있었으니 조선이라고 하는 특별한 환경에 서양마을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은둔의 나라 조선을 찾아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선교사들의 족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을 찾았다가는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정신학교가 사용하던 건물 한 동과 북장로교회 선교사가 사용하던 숙소 한 동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부러 찾아봐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감춰져있기에 아쉬움이 더하다.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니 현재 있는 건물들이 선교사들이 이곳에 있을 때 어떤 용도,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 중에 종로5가 지역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높은 건물인 여전도회관이 있는 자리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있었던 자리다.
어디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나지막한 언덕이 이곳에 선교사들의 주택이 있었던 곳이다. 그 주택들 가운데는 경신학교 교장이 살던 곳도 있었지만 이제는 흔적도 없으니 여전도회관 앞에서 시간을 거슬러 상상의 세계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