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요나와 베드로와 바울이 꿈을 꾸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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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와 욥바에서 만나는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 

사도행전 25:1-4에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Caesarea)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이 묘사되어 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던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때를 맞추어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던 터였다. 베스도는 이 같은 음모를 막고 바울이 가이샤라에 잠시 구금되는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이임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이후에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상소하게 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유로 백부장이 호위하는 가운데 로마로 가는 험난한 항로에 몸을 맡기게 된다.

헤롯이 세운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104km 떨어진 팔레스타인 해안에 있는 로마군의 주둔지였고, 교묘히 친로마 정책을 쓰던 곳이었다. 60m 넓이의 방파제는 남쪽 폭풍우에 대비하여 건축되었다. 물의 깊이는 36m로 완벽한 방어시설로 인공항구와 부두를 건설하는 데 12년이 걸렸다. 이곳에 원형 경기장과 로마의 공학기술을 말해주는 급수시설이 있다.

가이사랴에 총독의 본청과 급수시설을 위해 벽돌로 쌓은 아치가 있었다. 로마 멸망과 마찬가지로 이런 급수시설은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운 취약지가 되었다. 66년 반란이 일어나자 모든 유대인은 학살당하였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감금되었다가 유대인의 암살 음모에서 구출되고 유대 왕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그립바 2세와 베니게도 전시에 여기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기원전 22-10년에 세워진 지중해 해변의 항구 도시인 헤롯의 건축물은 지금도 웅장하다. 항구와 수로, 원형 경기장 및 도로,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아우구스투스 신전, 궁전 등은 당시의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대극장은 이스라엘에 의해 지금도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마로 향하는 팔레스타인의 관문으로써 서기 6년 이후인 예수 당시에는 로마의 총독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행 12:19) 여기에 고넬료라 하는 이달리야(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은 베드로를 불러 이방인으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이 되었다.(행 10:1-43) 아울러 바울 선교여행의 기지이기도 하였으며(행 9:30, 18:22, 21:8), 그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2년 동안(BC 58-60)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행 24:27), 그때 로마의 총독 벨릭스와 후임자 베스도와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을 펴기도 하였다.(행 25-26) 

이런 신약의 역사에 앞서서 가이사랴 인근의 욥바 항구는 요나서의 주인공 이야기로 유명하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욥바로 내려왔다. 그래서인지 욥바 인근에는 물고기 모양의 기념물이 즐비하다. 어찌 보면 욥바는 불순종의 항구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꿈에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부정한 것을 환상으로 보고서 더욱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지만, 거듭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욥바의 두 인물, 곧 구약 요나서의 요나와 신약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베드로전후서의 베드로는 각각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요나든 베드로든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당연히 유대인 선교에 몸을 담았던 구약의 선지자요 신약의 사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날 때부터 몸담고 있던 유대적 환경을 벗어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지도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요나는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고 제비뽑기를 당하여 바다에 던져지자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머물다가 니느웨 해안가에 토해져서 하는 수 없이 3일 길을 다니면서 니느웨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던 베드로는 거듭되는 환상에 더는 불순종할 수가 없어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가이샤랴로 가서 이방인 백부장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상황과 줄거리가 사뭇 다르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순례객이 욥바에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삶의 현장은 구분이 없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이 지배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아직도 이방인인 무슬림은 그 아래 종속된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이 없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요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요나와 베드로와 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울이다. 바울은 마지막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에 열심히 남달랐다. 베냐민 지파와 율법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최고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기도 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으로써 이방인의 사도로 변하여, 27년 동안을 지중해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다가 마지막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다시스로 가려는 요나의 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하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보다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한 베드로의 동생인 야고보가 순교한 서바나로 가려고 한 것이다. 성 야고보는 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이며, 그가 순교한 무덤이 ‘산티아고 가는 길’의 종착지인 콤포스텔라 교회이다. 복음은 이런 선각자들에 의해서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에게로 나아간 것이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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