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84) 고찬익 장로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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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는 게일 목사가 천민인 고 찬익을 초대 장로가 되는데 찬성했으므로 연동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양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분열되었다. 그러나 함태영이 아버지와 함께 묘동교회로 가지 않고 계속 연동교회에 남아 신앙생활을 하므로 연동교회는 천민의 교회가 아니라 양반들도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신앙으로만 아니라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이 신앙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라고 주장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연동교회는 사도 바울의 교회 관을 그대로 이어 받은 훌륭한 교회임을 역사적으로 나타냈다.
1904년 연동교회가 당회를 조직하면서 고찬익을 장로로 장립하고 1907년에 천민 출신이며 노름꾼 출신이었던 이명혁과 양반 이원긍을 장로 피택 한 후 투표하였으나 또다시 이명혁이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9년 3대 장로로 갖바치이며 광대 출신이었던 임공진이 선출되어 장립을 서두르자 법무협판(지금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이원긍 등이 반기를 들었다.
당시 교회의 오른쪽은 양반들이 앉았고 중앙에는 평민이 앉았으며 왼쪽과 뒤쪽에는 천민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원긍 만은 양반이 멍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항상 강단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3대 장로까지 광대 출신이 되자 천민 출신과 함께 할 수 없다며 이원긍과 함우택 등은 100여 명의 성도를 이끌고 나가 묘동교회를 세웠다.

연동교회는 1901년 부속건물에 예수교중학교(경신)를 세웠고, 교회가 예수교중학교와 연동여학교(정신)를 관장하면서 교육 사업에 힘썼다. 교회가 그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고 인간 영혼의 평등성을 중시하는 교회적 사명을 당시대에 실현시킨 획기적인 신앙의 승리를 얻어낸 교회였다.
또한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사로 파견되어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제적인 것임을 폭로하려던 이준 열사도 연동교회 교인이며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 작성자 최남선, 낭독자인 정재용 외 함태영, 김지환, 이갑성, 김원벽, 이상재, 박용희 등이 민족대표로서 만세운동의 획기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고 김마리아, 신의경 등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세워 투쟁을 했던 움직이는 교회였다.

길선주 목사의 소개로 김린서 목사는 1933년 8월 31일에 고찬익 장로의 누이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고 부인은 74세의 고령이나 단아하고 건강하여 그의 오라비인 고찬익 장로의 인품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오라버니는 나보다 두 살이 많고 자녀는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후손은 없습니다. 전도하는 일은 길선주 목사님이 나보다 잘 알지요. 나도 오라버님의 전도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라고 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보다 6년 연상이었다.
그러나 잘 알고 지내는 신앙의 동지였다. 길선주 목사의 말에 의하면 “고 장로는 경성교회의 기초역사에 가장 유공한 전도자이었습니다. 그리고 고 장로는 사랑과 겸비 등 신덕으로서 만인을 감화하였고 또한 만인의 존경을 받을만한 개척자였습니다”라고 칭찬했었다.(신앙생활 2권 10호, 1933년. p.22)
고찬익 장로하면 연동교회를 연상하고, 연동교회하면 고찬익 장로를 떠올리게 한다. 고찬익 장로가 예수를 믿고 전도를 한 16년 동안을 살펴보면 원산 광석교회에서 8년 서울 연동교회에서 8년을 지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선교사 게일 목사와 같이 한국교회 초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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