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국부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의 4대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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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부 이승만을 선택한 대한민국

1948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일 뒤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이에 군국주의 광란을 일으켰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그 결과로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한반도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승만인가, 김일성인가.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선택했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을 선택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부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동시대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로부터 위대한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정치가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 예언가의 위치에 달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1941)와 훨씬 이전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1923)은 그야말로 일본과 공산당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빛나고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하에 발단된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1910)은 해방 후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미리 내다본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이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성령의 능력이었다. 한성감옥에서 종신형 죄수로서 얼려 죽이는 형벌로 죽어가던 그 마지막 밤 그는 예수를 만났고 성령체험을 했다.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주옵소서.” 청년 이승만이 죽음의 문턱에서 올린 부르짖음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고 그를 만나주셨다. ‘평안과 희열’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정신적 활력’으로 생동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이러한 신비한 신앙체험을 평생 동안 지인들에게 전하였다.” 이때 체험한 성령의 능력이 나라 패망 이후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과 자유대한민국 건국에 이르기까지 평생동안 이승만을 이끌어갔다.

2. 대한민국 건국의 4대기둥과 그 70년의 결과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지 못했던 미국은 이승만의 즉각적 귀국을 막았다. 이승만은 해방 후 두 달을 넘긴 10월 16일에야 겨우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해방 전인 7월 13일에 평양에 진주해 있었고 미군은 9월 8일에야 겨우 도착했다. 그 이틀 전인 9월 6일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제멋대로 주석에 추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었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의 한국민주당 역시 그 10일 뒤에 창당하고 대표로 이승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둘 다 거절했다.

이승만은 자유대한민국을 다음 4대 기둥 위에 건국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둘째, 자유시장경제, 셋째, 한미동맹, 넷째, 기독교입국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주의, 통제경제, 조중동맹, 주체사상(주체교)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생지옥으로 변했다. 시간이 심판을 내린 것이다. 어떤 선택이 옳았는가를 건국 후 70여 년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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