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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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님께서 대궐 같은 자기 집 전체를 피난민들을 위해 내놓으시고, 장로님 가족은 장로님이 농사하시는 과수원에 초라한 오두막 집에 가셔서 지내셨다.

우리 가족도 장로님 집 방 한 칸을 빌려주셔서 거의 1년을 피난살이를 했다.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셨던 장로님이셨다. 그 장로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성주에서 사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대구에 정부가 피난민을 위해 마련해준 춘천 중·고등학교 분교에 한 주에 하루만 강사로 나가셨다. 어머니는 감을 큰 자루에 가득 가지고 버스로 대구에 가셔서 팔고, 판 돈으로 화장품을 사 오셨고, 그 화장품을 오일장이 서는 마을마다 찾아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시골에 가셔서 집집이 찾아다니시며 장사도 하셨다. 시골에서는 돈이 없어 쌀로 바꾸기 때문에 며칠 만에 집에 오실 때는 쌀을 다 이고 오실 수가 없어 나의 바로 아래 동생을 데리고 다니셨다. 동생도 어머님도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를 했다가 1951년 3월 24일 38도선을 넘어 철원 금화 일대까지 진출을 했을 때 1951년 6월 11일에 소련이 제안한 휴전교섭을 미국이 받아들여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처음 시작된 협상은 본회담 159회를 비롯 각종 회담 765회(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 외국인 철수 문제, 정전 감시 위원 설치, 포로 소환 방식)를 통해 2년에 걸쳐서야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회담이 시작되고 전쟁도 중지 사태라서 1952년 봄에 원주 피난민 수용소로 가기로 했다. 우리 집은 전쟁 중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되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는 흙벽돌로 지었는데 작은방 하나에 부엌도 한 사람 겨우 설 수 있게 만든 집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니께서는 막내 여동생을 해산하셨다.

수용소 좁은 방에서 아홉 식구가 도저히 누울 수가 없어 벽에 판자를 붙여서 방 하나를 만들었고 나와 바로 아래 동생은 거기서 지냈다.

피난민들이 원주로 모이자 정부에서 피난민을 위해 원주에 종합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직접 천막을 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설립에 헌신적으로 수고를 하셨다.

나는 전쟁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으나 2학년으로 복학을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를 했다. 1953년에 졸업을 하고, 강원농대 부설 중교에 입학을 했다. 1학기가 끝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어 강원대학이 춘천으로 복귀가 되었다.

나는 춘천에 집도 없었고, 그때 아버지께서 남자중학교 교감으로 계셨기 때문에 가족이 춘천으로 갈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나 혼자만 춘천으로 가게 되었다.

마침 외사촌 희순 언니가 남동생과 둘이서 살고 있어 언니 집에서 다녔다.  희순 언니는 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학교 동창생이었다.

큰외삼촌이 병원을 하셨기 때문에 넉넉한 생활을 하셔서 내가 자랄 때 외삼촌 사랑을 많이 받았고 많은 도움도 주셨었다. 내가 몸이 아플 때마다 치료해 주셨던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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