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풍금(風琴)(리드오르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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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번 창피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교복을 입은 채로 냄새나는 돼지 뜨물 담은 양푼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면서 반가워하시는데 나는 너무도 창피해서 인사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갔었다.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풍금을 배우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1년 반쯤 지나면서 6.25전쟁으로 배움의 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1.4 후퇴로 경상북도 성주까지 피난을 갔었다. 하지만 그 고생스러운 피난 생활 중에도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1년을 피난살이를 하면서도 매일 새벽이며 교회를 찾아가 기도한 후에 교인들이 다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그 시간에만 피아노를 잠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전(停戰)이 되고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새벽예배 드린 후 피아노 연습을 했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시할아버님 할머님,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 두 분과 시누이도 함께 살며 교편생활도 했었다. 약 4년을 살면서 아들 둘도 낳았다. 4년 후 남편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아 서울로 오게 되었다. 남편의 육군사관학교 교수 생활 3년 후 나는 셋째로 딸을 낳았다. 딸을 낳고 첫돌이 되기 전 나는 하고 싶었던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딸을 업고 다니며 처음에는 음대 나오신 황기복 선생님, 나중에는 신촌에 있는 음악학원 원장님 장상순 선생님의 교습을 받았다. 무더운 여름에는 어린 딸이 등에서 땀을 흘리며 울 때도 많았다.

아이를 업고 2시간에 한 번 다니는 미니 합승버스를 타고 다니기가 힘은 들었어도 배움의 기쁨이 있어 견딜 수가 있었다. 그렇게 배워가며 육군사관학교 교수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원했던 피아노 공부를 하며 집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고 행복했었다. 수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면서 부채도 다 갚았고, 장로님도 대학원을 다 마치셨고, 생활에도 많은 보탬이 되고 교회 봉사도 할 수 있었다. 육사교회 초창기에는 피아노는 없고 리드오르간(풍금)만 있었다. 반주자로 봉사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무반주로 예배드리고 있다는 목사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반주를 하게 되었다. 풍금을 배운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교회 반주자로 쓰임 받기를 원했던 꿈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육사교회를 건축한 후 어느 독지가께서 피아노를 기증해 주셔서 나는 피아노 반주를 했었고, 수년이 지난 후 육사교회에 해먼드오르간도 기증받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오르간 반주도 했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43세에 오르간이 배우고 싶고, 교회음악도 공부하고 싶어 기독교음악 통신대학 오르간과에 입학을 했다.

이론 공부는 통신으로 하고, 한 주에 한 번 문제의 답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실기는 한 주에 1회 교수님 집에서 오르간 레슨을 받았다. 학기마다 방학 전에 1주일 동안 전교생이 신학교 기숙사에 합숙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받고 마지막 날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방학을 했었다.

집에 오르간이 없어 육사교회 목사님께 허락을 받고 교회 해먼드오르간으로 연습을 했었으나 아이들 교습도 많았고, 교회도 집에서 멀어서 연습시간이 부족하고 힘도 들어서 할 수 없이 피아노과로 전과를 하고 1년을 피아노 공부를 했다. 힘든 과정이었으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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