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한국교회와 부녀자 전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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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도부인의 등장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 땅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도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이다. 예수의 성육신이 복음의 첫 단추이다.

연세대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도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했다.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를 창립할 때는 저 무시무시한 개정사립학교 규칙이 발표된 직후였다. 개정사립학교 규칙의 골자는 첫째, 예배 금지, 둘째, 성경 교육 금지였다. 물론 종교라는 폭넓은 언어를 썼지만 당시 사립학교가 거의 다 예수교회 부설의 것이요 기독교 계통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곧 미션스쿨에서도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학교 교육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 전체를 비기독교인의 손에 넘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우리는 직접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교육할 수 없어도 기독교인의 삶의 모범을 보이는 교사와 교수들을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15년 4월 12일 연세대학교 당시 조선기독교대학이 개교했을 때 그 학생들 역시 세심한 기준으로 선별했다. 그 모습에서 기독교인의 풍모가 풍기는 학생들이 선발되었다. “61명의 지원자들이 등록하고 개교했습니다. 처음에는 대학 정원을 비교적 적은 수로 유지해서 이 대학의 정신을 형성하고 가장 고귀한 기독교인의 이상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던 전도부인은 기독교가 한국에 한 실제 요소로서 한국을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게 한다는 표식이었다. 전도부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 한 사람 거듭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생명의 복음을 들고 나라 방방곡곡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이 전도부인의 등장은 기독교 신앙이 유교사회의 악습에 매여 살다가 허망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어떻게 놀랍게 영생의 소망에 넘친 역동적인 전도인으로 바꾸어 놓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2. 초창기 한국인의 신앙을 대변했던 찬송가의 작사자가 여성

초대 한국교회에서 교파로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장로교 감리교 양 교파의 찬송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한국인이 지은 찬송가가 있었는데 이 한국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성이었다. 이때 장감 양 교파이면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한다고 봐도 흠이 없는데 이 양 교파가 다 이 찬송가를 불렀다면 한국교회 초창기 신앙고백을 대표했던 찬송가가 바로 한국 사회에서 고래로 천대받던 여성의 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그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의 높은 이름이 내 귀에 들어온 후로 전 죄악을 소멸하니 사후 천당 내 것일세.” 예수를 믿은 감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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