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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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서의 목회 활동 (4)

그가 총회장이 된 1927년은 한국교회 해외선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해외선교 폐지(廢止) 운동이 격하게 일어났던 해였다.

중국 산동 선교사업 철폐(撤廢) 문제는 황해노회의 이승길 목사가 발의(發議)하였고 안악(安岳) 김경하(金京河) 목사가 찬동하기에 이른다.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중국 산동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김영훈 목사는 1927년 9월 9일부터 원산부 광석동예배당에서 개최된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는 충청, 평북, 함북, 동만(東滿), 남만(南滿), 전북, 의산, 산서, 함남, 경안, 순천, 안주, 평서, 평양, 함중, 전남, 황해, 경남, 경북, 경기 등 20개 노회를 대표하는 목사 회원 89명, 장로 회원 89명, 서양선교사 회원 34명 도합 212명이 참석하였으며 임원선거를 실시하여 총회장에 김영훈, 부회장 렴봉남, 서기 홍종필, 부서기 장규명, 회록서기 정일선, 부회록서기 최상렴, 회계 리춘섭, 부회계 백남채를 선출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2년에 창립되었으며 총회창립을 기념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3명의 선교사를 중국으로 파송하였는데 1927년에 이르러 중국 선교사 출신 김영훈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된 것이다.

장로회 총회의 외국선교는 191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중국에 그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여러 나라로 선교사를 보내고 있다.

1922년에 중국 산동으로 파송되었던 이대영 목사는 후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측) 총회장이 되었으며 1937년에 중국 산동으로 파송되었던 방지일(方之日) 목사 역시 후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측) 총회장이 되었다.

이대영, 방지일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남북이 갈라지고 장로회 총회마저 분열되면서 각기 다른 장로회 총회에 소속되어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될 때에 창립을 기념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자고 헌의한 노회는 황해노회였다.

황해 노회록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전도위원 김익두 씨가 보고하기를 우리 노회의 은혜 받은 것과 이 세상 어두운 것과 예수께서 마지막 명령하신 것을 생각하니 외국전도 아니할 수 없은즉 총회에 헌의하여 청국 중에 맡을 지경을 얻어 가지고 복음 전파하기를 청원하되”

황해노회는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역사에서 처음으로 외국전도를 발의한 노회였으며 황해도 재령읍교회 위임목사이자 제3회 황해노회 서기였던 박태로 목사를 첫 선교사로 선택하여 1913년 5월에 파송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선교사 파송 내력을 알지 못하는 황해노회 몇몇 인사들이 중국선교를 폐지(廢止)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황해도 신천군 읍내 예배당에서 개최된 황해노회는 노회장 장의택(張義澤) 씨 사회 하(下)에 회원 80여 명이 제반사항을 토의 진행하던 가운데 특별히 중국 산동 선교사업 철폐(撤廢) 문제를 거론하였다.

산동 선교사업 철폐 문제는 이승길(李承吉) 목사가 발의하였고 안악(安岳) 김경하(金京河) 목사가 그 건의에 찬동하면서 자기가 직접 산동에서 3년이나 거주하며 선교지방을 시찰한 것과 목도(目睹)한 상황을 전거(全擧)하여 산동 선교사업 철폐를 극력 주창(主唱)하였으므로 전 회원 중에서 철폐를 반대하는 자는 근 2인에 불과하였다.

중국 산동 선교사업 철폐 문제를 발의한 이승길 목사와 노회원들은 당시(當時)에 발행되던 기독신보(基督申報)에 실린 성산(聖山) 장덕로(張德櫓) 목사의 글 “조선장로회(朝鮮長老會)의 산동선교(山東宣敎)에 대(對)한 나의 관견(管見)”이란 글을 읽고 산동 선교사업 철폐 찬성(贊成) 쪽으로 움직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중국 남경(南京)에 살던 성산 장덕로 목사는 중국교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황해노회 소속 안악 김경하 목사는 1921년에 중국 남경이 있던 금릉신학교(金陵神學校)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중국 산동성(山東省) 창구(倉溝)와 태아장(太兒莊)교회에서 전도경험을 한 인물이다.

김경하는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던 길에 산동 즉묵(卽墨)에 주재하는 이대영 선교사 댁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도 하였다.

황해노회의 중국 산동 선교사업 철폐 문제는 중국 남경에 살던 성산 장덕로 목사의 글과 황해노회 이승길 목사의 발의 김경하 목사의 극력 찬성으로 폐지 결의 분위기였으나 1년 동안만 유한(有限)하자는 김룡승(金龍承) 목사의 주창(主唱)으로 결국은 유한하기로 가결되었다.

황해노회의 산동선교폐지(山東宣敎廢止) 분위기는 동아일보(東亞日報) 1927년 7월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어서 산동선교사 출신 김영훈 목사의 “山東宣敎異議에 對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형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선교방침은 가까운데서부터 먼데까지라고 행1장8절을 유력(有力)하게 인증(引證)하여 산동선교를 폐지(廢止)하여 중국 각처(各處)와 노령(露領) 등지(等地)와 일본 각처에 산재유리(散在流離)하는 우리 동포(同胞)를 선구(先驅)하자 하였으니 나도 우리 동포의 고난(苦難)을 사(思)할 시(時)에 심(心)이 상(傷)치 않는 것이 아니며 루(淚)가 낙(落)치 않는 것이 아니나 타방면(他方面)으로 전도국(傳道局) 경제력을 충족(充足)케 하여 동포 목양(牧養)을 계획할지언정 기설(旣設)한 선교기관을 파괴(破壞)하여 달리 목양사업을 경영(經營)하려는 편심(偏心)은 무(無)하다.

만일 산동선교를 폐지(廢止)한다면 행1장8절에 말씀하신 주(主)의 본의(本意)가 아닌줄 나는 안다. 주(主)의 말씀하신 본의(本意)는 동족(同族)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전도(傳道)하라 하심이요 동족을 유루(遺漏-누락)없이 다 믿게 한 후(後)에 타족(他族)에게 전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각국(各國)에서 선교한 사실(事實)도 그러하다. 영미국(英美國)이 선교사(宣敎師)를 파송할 시(時)는 기국인(其國人)이 다 믿은 후(後)가 아니다. 내가 목격(目擊)도 하였다.

세계에서 기독교국(基督敎國)으로 공인(公認)하는 미국(美國)도 불신자의 수(數)가 신자수(信者數)에 비(比)하여 기배(幾培)나 가다(加多)하다.”

오늘날에도 나는 동포전도와 목양에만 힘쓰겠다고 해외선교를 멀리하는 이들이 적지 아니하며 해외선교만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아니하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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