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수형번호 675호, 춘원 이광수 법정에 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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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모든 신문은 이날 이광수의 재판 최후 진술 내용을, 일제히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한편 신문을 보고 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옛날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의 일화를 잠시 떠올리고 있었다. 옛날 1906년경 이광수와 홍명희는 일본 다이세이 중학(中成中學)에서 함께 수학한 것을 계기로 무척 가까웠던 친구였다.

그런데 후일, 두 사람의 길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두 사람 모두가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인재들이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이광수는 친일로, 홍명희는 항일로 서로 다른 길을 고집스레 걸었다.

정말 모두가 그랬을까?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하지 않은 자가 이 땅에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죄없는 자,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했던 예수님처럼, 양심적으로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 과연 이 땅에 몇 명이나 있을까? 자신 있는 자 나서서 말해 보라!

이들은 한때는 함께 독립운동을 열심히 한 동지였다. 이 때 동경삼재(東京三才), 즉 세 사람의 동경 천재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고, 또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벽초 홍명희라 했다. 세월이 흘러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은 변절해 창씨개명을 하기에 이르자, 홍명희는 어느 날 한용운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 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 라고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발끈 따져 묻는 홍명희에게 한용운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 놈들은 개만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 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홍명희는 그 말에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한용운은 혼자서 비시시 쓴 웃음을 웃고 있었다. 

춘원의 파란만장한

58년 인생 스토리

이광수는 1892년 평안도 정주(定州)의 몰락한 벼슬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살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일본 관현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했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대성중학을 다니며 만난 4년 연상의 홍명희, 문일평과 함께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비 곤란으로 이광수는 같은 해 11월 귀국했고 1907년 황실 유학생으로 메이지(明治) 학원에 중학 3년으로 편입해 다시 공부하던 중 단편소설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했다.

이때 동창회보인 ‘백금학보’ 제19호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했다. 어느날 도쿄에서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1910년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3월 보통부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해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7월 중매로 백혜순(白惠順)을 만나 혼인했다. 1913년에는 세계여행을 위해 오산학교를 그만두었다.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단념하고 상하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등과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 1915년 9월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 예과를 거쳐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 춘원의 작품은 천애 고아로 자라나 애정 결핍때문인지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126회에 걸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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