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목사 청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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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노회를 놀라게 한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송수석 목사는 자기 집을 성전(교회) 증축 때 바쳐버리고 교회 사택에 살고 있어서 사후 가족들의 거주가 문제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슴 아픈 유족에게 교회 사택에서 떠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회를 열어 이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당회장으로 왔던 은혜 노회 목사는 송 목사가 성전증축에 자기 집을 바쳐버렸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교회를 떠나게 되면 어쩌려고 집을 바칩니까?” 그러나 ‘주의 종’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우리는 “교회에 사택이 생겼는데 자기 집을 또 가지고 있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물었다. 회의는 진행되어 사택은 송 목사에게 드리고, 3년간 월 $500씩 자녀교육 보조비를 드리고, 1985년 1월분 봉급까지는 전액을 드리자고 제안했다. 또 새로 목사가 부임하면 시내에 당분간 아파트를 임대해 살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노회에서 파송되어 온 당회장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든 이 집은 교회 재산이기 때문에 교인 전체의 공동의회에서 결의해야 한다고 다음 해 둘째 주일을 정해 공동의회를 하기로 했다. 

1985년도 제1차 공동의회가 1월 13일 열렸다. 이때 공동의회를 사회하던 의장은 Ben McAnalley 목사였다. 먼저 당회에서 제안한 9명의 청빙위원은 11명으로 하자는 개의가 있었으나 9명으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 후 1985년도 감사 2명을 선출하고 송수석 목사의 ‘유족 처우의 건’을 논의하게 되었다. 목사 유족이 교회 사택에서 살고 담임할 목사가 임대 아파트에 살게 하자는 것이 당회 안이었는데 McAnalley 당회장은 이것은 모양새가 안 좋다고 반대해서 무기명 투표를 하기로 했다. 거기서 참석인원 125명 중 찬성 100표, 반대 22표, 무효 3표로 당회의 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을 보고 McAnalley 당회장은 다시 한번 놀랬다. 한국 교회는 모든 것이 ‘은혜’스러워야 했다. 당회는 공동의회가 끝나자 유족 대표, 송 사모에게 주택 증여서류를 교우 일동으로 드리고 1985년 1월 25일 회계법인에서 공증한 공증서(Notary Public)도 드렸다. 

 2월 정기 당회 때부터는 노회에서 George Adams 목사가 계속 출석했는데 개인 사정이 있어 불참할 때는 당회록은 사후 제출하고 결재를 받았다. 나는 계속 당회 사회를 맡았고 당회 서기는 박영남 장로, 제직회 서기는 손정수 집사, 목사 청빙 위원장은 이정휘 장로가 맡았다. 문제는 계 목사님을 모시는 일이었다. 우리 교인들은 최창욱 목사님의 추천을 받은 계 목사를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3월 24일의 정기 당회 때 Adams 목사는 개회할 때 참석했으나 미리 떠난 뒤였는데 우리는 계 목사 안건에 들어갔다. 목사 청빙 위원장은 전년도 당회 서기였던 이철남 장로를 대표로 계 목사에게 보내어 3월 31일까지 접촉해 가능하면 4월 3일, 여 선교회 헌신예배에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노회는 목사 청빙 위원회가 노회가 요구하는 교회정보 양식은 만들지도 않고 최 목사의 말을 듣고 계 목사를 만나보고 그에게 교회에서 설교까지 하게 했다고 크게 화를 냈다. 노회는 이것은 법을 아는 최 목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당회 서기인 박영남 장로를 통해 노회에 최 목사를 변명하는 두 쪽에 달하는 긴 글을 써서 그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간청했다. 그리고 요식행위를 거처 교회정보 양식을 만들었다. 다행히 교회 목사를 원하는 10명의 지원자가 설교 테이프와 함께 보내온 서류가 있어 의견을 종합해 노회에 보냈다. 그리고 4월 20일 8시 30분에 임시 당회를 열고 이튿날 공동의회 소집을 공고하고 5월 5일 공동의회를 소집키로 했다. 동시에 계 목사에게는 노회에서 원하는 목사고시를 봐달라고 사정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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