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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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와 만나 제주서 농림학교 세워 

‘성내교회’를 시작으로 15여 교회 개척

이호리에서 전도해 예수 믿는 사람이 한두 사람 늘었다. 그래서 그는 에비슨 선교사에게 목회자를 보내 달라고 편지했다. 그때 마침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1회 독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부부가 제주도로 파송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전도되고 교회가 세워졌다. 그것이 1908년 2월이었다. 

이 무렵 1907년 제주에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가 귀양왔다. 그는 갑신정변으로 두 차례 20여 년 일본 망명 생활을 했다. 그런 중에 박영효는 일본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의 조선인들을 위해 ‘칠 인의숙’을 세웠고 조선이 개화하려면 교육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박영효는 제주에 귀양하면서 과수원을 조성하고 학교를 세웠다.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운 만큼 제주인에게 귤나무 재배법을 가르쳤다. 

자신이 과수원을 조성해 제주 감귤 생산에 공헌했다. 1908년 6월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박영효는 돌아오지 않고 제주에 의신학교를 세웠다. 1910년 9월까지 제주에 머물렀다. 이기풍 목사가 이런 박영효를 만나게 됐고 함께 농림학교를 세웠다.

세 명의 신자들과 함께 향교골 허름한 초가집에서 모이던 기도 모임이 교회가 되었다. 교회의 이름도 성 안에 있어서 ‘성내교회’로 했다. 옛 출신 청앞에 목조 52평 예배당을 지었다. 교회설립계를 내면서 ‘제주 성내교회’라 했다. 성내교회 이후 금성교회, 한림교회, 이기풍 목사는 모슬포교회 등 15여 교회를 세웠다.

1909년 5월 큰 홍수가 났을 때 이기풍 목사가 물에 떠내려가는 40대 여인과 몇 사람을 구했다. 이 일로 제주민들은 “야소교 목사라는 자가 과히 나쁜 사람은 아니다”로 알았고 조금씩 복음의 문이 열렸다. 윤함애 사모는 희생적으로 봉사했다. 불신자가 하나, 둘 교회로 왔다. 그녀는 난민을 도왔다. 이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는 성령의 치유와 영적 능력으로 전도했다. 11살 된 앉은뱅이를 위해 이기풍 목사가 7일 동안 기도한 후 그 아이가 걸었다. 하루는 귀신들린 자를 데려왔다. 쇠사슬로 묶어도 풀고 도망갔고, 길가는 사람 상투 끝의 은비녀도 감쪽같이 훔쳐내는 도둑 미치광이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 사람을 묶어 놓고 기도했다. 다른 때는 묶은 것을 풀고 달아났는데 그날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이유는 늘 대장이 와서 도망가게 했는데 오늘은 천군 천사가 창을 들고 집을 둘러싸서 대장이 못 들어왔다. 이기풍 목사 가족은 이 말을 듣고 식음을 폐하고 합심 기도했다. 밤에 그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한참 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회에 나와 복음을 믿고 집사가 되었다. 이같이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많은 복음의 씨를 뿌리며 선교해 교인이 410명, 예배당 3곳, 기도처가 5곳, 매주 모이는 성도가 300여 명이 되었다. 

그때 향교 골에서 시작한 기도처가 제주 최초의 서문통(성안=城內) 교회가 되었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촌락을 다니며 교회를 개척했다. 1908년에 성내교회 외에 금성교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 조천교회, 성읍교회, 모슬포교회, 1914년 중문교회, 1915년 한림교회, 세화교회, 삼양교회, 1916년에 고산교회, 1917년 법환교회, 1918년 용수교회, 1919년 제주 성지교회가 설립됐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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