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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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29)

상주에서 안동까지(4)

회룡포를 두루 돌아다녀 보지 못한 채 제1 뽕뽕 다리에 올라본 후에 그냥 대충 바라 회룡포를 쳐다본 뒤에 떠나야만 하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앞으로의 순례 행사를 위한 예비 답사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예천행 버스를 타고 예천으로 갔다. 그런데 배위량은 예천읍 시가지에 들리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예천읍은 예천의 중심지이고 전체 예천군을 대표하는 곳이기에 예천의 어떤 장소를 배위량이 와서 머무르며 전도했다면 예천을 찾아 왔던 것이다. 배위량이 예천 어떤 지역을 거쳐 갔다면 예천군은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으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인 지역이므로 배위량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지역이다. 그것은 그가 비록 예천군의 중심인 예천읍시가지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예천군 풍양면, 용궁면, 개포면, 예천읍을 왼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천읍 변두리 지역, 즉 예천읍 상동리와 왕신리를 거쳐 호명면 종산리를 거쳐 월포리의 작은 강마을에 5월 3일에 잠을 잔 후에 4일 아침에 월포리 강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큰 마을인 호명면의 소재지인 오천리를 지나면서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 안동 풍천면 변두리 지역을 거쳐 풍산읍으로 갔다. 필자가 이렇게 유추하는 것은 단순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예천군은 모든 길이 예천읍으로 향하는 것이 먼저이다. 더욱이 1893년 당시에 토목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그 시절의 길을 지금처럼 생각하면 오산이다. 

배위량은 용궁에서 개포를 거쳐 예천읍으로 가다가 예천읍 시가지에는 들어가지 않고 예천읍 왼편에 두고 예천읍이 눈에 보이는 변두리지역을 거쳐 호명으로 가서 풍산으로 갔을 것이다. 호명에서 풍산까지 가는 길에 풍산면 소재지는 그 노정에서 멀어 그곳까지 내려갔다가 풍산까지 갔다면 ‘5월 4일, 목요일 정오’에 풍산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므로 풍천면 변두리 지역을 거쳐 풍산읍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배위량이 1893년 5월 4일에 건넜던 두강은 무슨 강인가?

1893년 5월 1일(월) 밤에 용궁에서 쓴 일기에 따르면 배위량은 상주를 출발해 예천 용궁에 도착했다. “하인 두 사람이 병이 나서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서 지체하였다”라는 언급을 하는 배위량의 일기에 따르면 배위량은 5월 1일 월요일 아침에 상주를 출발해 용궁에 그날 밤에 도착했다. 상주를 출발해 용궁까지 오는 길이 짧은 길은 아니다. 그가 상주에서 용궁까지 어떤 길을 따라 걸었는지 그 노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옛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비 때문에 그는 용궁에서 5월 3일 정오까지 머물다가 비가 멈추자 풍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가 어떤 노정을 따라 용궁에서 풍산으로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오늘 아침에는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왔다.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라는 그의 일기를 유추해 볼 때 용궁에서 예천군 개포면 지역을 지날 때 그날 내성천을 건너지 못하고 내성천 북쪽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잤다고 판단된다. 

5월 4일에 쓴 일기에서 배위량은 5월 3일에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잔 후 4일 아침에 풍산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다음 3 문장을 통해 말한다. 

1.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2. 오늘 아침에는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왔다. 

3.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

그는 4일 아침에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고 한다. 그가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면 어느 강을 건넜을까? 용궁에서 출발해 개포와 호명을 거쳐 풍산까지 가는데 만날 수 있는 강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과 낙동강의 지류인 신역천이다. 그런데 그가 말했던 두 강은 어떤 강일까? 

용궁에서 풍산까지 가자면 반드시 내성천을 건너야 한다. 그가 4일에 내성천을 건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4일 아침에 건넌 또 다른 강은 무슨 강일까? 이런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학술 소논문이나, 1893년 당시의 지리 문화 역사와 당시의 길과 나루터 상황을 살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에게 주어진 지면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 지난하고 복잡한 문제에 매달리면 다른 것을 전혀 다룰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또 피해가는 것도 책임 회피인 듯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에 매달리게 되면 이 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채 필자의 글을 마쳐야 하는 상황이다. 늦어도 3월 첫주까지만 필자에게 허락된 제한적인 지면 여건 아래서 필자가 제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배위량이 5월 4일에 쓴 일기에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란 언급이 나타난다. 여기서 배위량 글에 나타나는 논리상의 혼란을 볼 수 있다. 배위량같이 탁월한 지성인이 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말하다가 아무런 언급이 없이 갑자기 ‘어제’ 일어난 일을 말했을까? 

그는 일기에 시간적인 오류를 알고도 오늘 일을 말하다가 어제 일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 일어난 일인데, 오타나 실수로 ‘어제’라고 적은 것일까?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란 언급은 예천읍이 더 가까이 있는 내성천 북쪽 지역을 지나면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내성천을 건너온 상황, 즉 내성천 남쪽 지역을 지나면서 저 멀리 왼편에 있는 예천을 말하는 것일까? 

1.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2. 오늘 아침에는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왔다. 

3.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

위의 배위량의 세가지 문장은 간단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지만, 이 글을 이해하고 배위량의 여행 경로를 추적하는 일에 쉽지 않는 숙제가 된다. 

위의 문장 구조를 다음과 같이 3.1.2. 순서로 바꾼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 같다.

3.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

1.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2. 오늘 아침에는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왔다.

만약 배위량이 자신의 여행일정을 정확하게 적는 일에 개의치 않고 단지 그날그날 일어난 것에 관심을 두고 무엇을 적고 난 뒤에 비로소 생각나는 어떤 것을 덧붙여 적었다면 3.1.2. 구조가 시간상으로 더 맞을 것 같다. 

만약 필자의 이런 유추가 맞다면 배위량은 1893년 5월 3일에 용궁에서 개포면을 지나 예천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을 건넌 후 예천읍을 왼편 가까이에 두고 지나서 호명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그날 나룻배가 더 이상 강을 건너지 않아 그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 작은 마을은 내성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아마도 강나루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5월 4일 아침 일찍 그 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내성천을 건너 호명으로 가서 호명에서 풍산을 향해 가면서 또 다른 강인 신역천을 건너 풍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필자의 유추가 맞다면 배위량이 5월 4일 풍산에서 쓴 일기에 언급한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분명히 호명일 것이다.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 건너편의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잔 후 풍산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호명이외에 달리 다른 곳을 찾는 것이 애매하기 때문에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분명히 지금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의 한 부분이 위치한 호명면일 것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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