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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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⑤

어떤 손님 와도 고아들과 같이 밥 먹어

일생을 고아들의 부모 되기로 약속해

부인의 희생으로 청빈한 목회자로 삶

수만의 불행한 소년들 보금자리 되어

삼동(三同) 소년시

황광은이 난지도에 소년시를 건설할 때 그는 한국전쟁 때의 대부분의 집이 그랬었던 것처럼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에게 용기를 주고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아내 김유선 여사였다. 그 무렵의 일에 대해 황정은 장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년 시절부터 광은 형님은 엉뚱한 데가 있었다. 나는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해서 광은 형님의 추천으로 그 당시 YMCA 건물에 있던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2학년 때 6‧25사변이 터져서 큰형님(황태은 장로)과 나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광은 형님은 서울에 남아서 고아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공산군 치하에서 석 달 동안을 잘 이겨냈다.

나는 부산에서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소위가 되어 일선 소대장이 되었다. 나는 북진하는 부대와 함께 서울을 지나가면서 그 동안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가족들과 광은 형님을 서울에서 기쁨 가운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그 이튿날 일선으로 떠나는 나에게 광은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북 동포들도 우리 형제이니 사랑으로 대해라. 먼저 북진한 유엔군과 국군의 평이 별로 좋지 않더라.”

어머님도 내게 포켓 성경책을 주시면서, “이 성경책을 꼭 지니고 다녀라.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주실 것이다” 하셨다.

우리 부대는 인민군들과 전투를 하며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그들에게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1일, 우리 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혀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고, 나는 포로가 되었다. 나는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휴전이 되고 포로 교환이 되면서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사이에 집안 사정은 많이 변했다. 어머니는 군대에 나가 실종된 아들을 기다리며 마음 죄시다가 피난지 부산에서 돌아가셨고, 광은 형님은 결혼하여 난지도에 보이스 타운을 설립하여 200여 명 되는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와서 처음으로 유선 형수님을 뵈러 난지도로 갔다. 첫 딸 진숙이가 태어나 있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광은 형님을 장가보내려고 한없이 권유하고 애써도 거절을 하시던 광은 형님이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는 평생 동안 고아들과 같이 살아야 될 사람인데,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줄 여자가 있으면 당장에라도 결혼을 하겠는데 그런 여자가 없다는 것이 틀에 박힌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던 광은 형님이 장가를 드셨다니 형수님은 어떤 분일까 하고 몹시 궁금하였다. 광은 형님과 제주도 한국보육원에서 같이 근무하시던 형수님은 광은 형님과 고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기로 일생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때가 되어 형수님은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꽁보리밥에 시래기 소금국에 시퍼런 김치가 메뉴의 전부였다.

“미안해요. 죽었다 다시 살아온 처음 뵙는 시동생을 이렇게 대접해서… 우리는 결혼할 때 약속했어요. 누가 손님으로 와도 고아들과 같은 솥의 밥을 먹겠노라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 음식을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화여대 동창들이 또는 고관의 사모님들이 혹은 돈 많은 사업가의 부인들이 사회사업을 하는 동창생인 형수님을 찾아와도 식탁의 메뉴는 언제나 똑같았다. 아마 대통령이 방문을 했어도 그 식단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님 황광은 목사가 사회사업을 하고 청빈한 목회자로서 일생을 고고하게 살다가 갈 수 있게 된 데는 광은 형님의 반쪽 분신인 김유선 형수님의 희생과 헌신이 늘 뒷받침되었다.

김유선 형수님은 난지도에서 200여 명 고아의 어머니로, 그리고 의사로 그들을 친자식처럼 길러냈다. 훗날 난지도에서 나와 광은 형님이 부목사로 시무하시던 새문안교회 좁은 사택에는 10여 명의 고아들이 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메추라기를 길러서 팔아 생활비로 혹은 학비로 보태주던 형수님의 헌신적인 내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광은 형님은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셨고, 돈에 대해서는 늘 초연하게 사신 분이셨다. 광은 형님이 월급을 받아 또는 강연 같은 것으로 사례비를 받아 아주머님에게 전달한 일이 그의 생애에 몇 번이나 되었는지 형수님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황광은 ‘큰형님’이 난지도에 소년시를 창설하게 된 동기와 경위에 대해서는 소년시에서 발행하던 신문 <소년시> 창간호 사설에 잘 나타나 있다. 4×6배판 4면으로 된 프린트로 인쇄된 <소년시>의 창간호가 간행된 것은 1953년 11월 9일(월요일)인데, ‘<소년시>를 내어놓으면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사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쁜 소년은 없다’의 정신을 토대로 한 미국 보이스 타운이 훼르거넌 신부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건설된 지 33년, 수만의 불행한 소년들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들의 앞길을 밝히 열어 주었으며, 지금도 수천 명의 소년들의 도장으로 되어 있거니와, 이 위대한 사업이 한국에서도 서울 근방 수색 난지도의 우리 삼동 소년시에서 시작된 것을 먼저 소년시민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 올리는 바입니다.

6‧25동란 훨씬 전에 수명의 소년들로서 첫 시작을 한 우리 삼동 소년시는 그 동안 은밀한 가운데서의 끊임없는 기도와 분투의 결과로 지난 8월 12일 20채의 아담한 양옥의 낙성식을 마치고, 세계에 자랑할 소년의 나라 살림이 본격적으로 계속되게 된 것입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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