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로마 카타콤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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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박해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Judas Iscariot)가 스승을 배신한 뒤 맛디아(Matthias)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12 사도들 가운데에서 사도 요한(John)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박해가 가장 오랫동안 혹독했던 곳은 로마였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의 속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 로마제국은 네로(Nero, 64) 때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303) 때까지 250여 년에 걸쳐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 10차례 대박해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네로·데키우스·디오클레티아누스 때가 가장 심했다.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를 비롯한 동물들이나 검투사들과 싸우다가 희생당하기도 했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외곽 지역에 있는 지하묘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이런 지하묘를 카타콤(Catacomb)이라고 한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으로 더 많이 모여들었고, 카타콤을 여러 층으로 파고 들어가 미로가 되었다. 최초의 교회 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로마 황제들의 박해상을 기록하고 있다. 타키투스(Tacitus)의 ‘연대기(Annales), 15, 44’에 의하면, 네로 황제가 64년 7월 19일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지르도록 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기독교도들의 방화혐의로 몰아 4년간(64~68) 모질게 박해하였다. 이 시기에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서 역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했고, 바울은 로마 남문 교외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인 트레 폰타네(Tre Fontane)에서 참수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58년에는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의 박해를 피해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유해를 카타콤으로 임시 안치하기도 했다. 기독교 고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지오반니 로시(Giovanni Rossi) 신부는 성 칼리스토(San Callisto) 카타콤에 대한 발굴을 주도하여 그곳에서 기독교 박해기에 순교한 교황 9명과 주교 8명의 무덤과 체칠리아(Cecilia) 성녀의 무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고고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지금까지 로마 주변에서만 60여 곳의 카타콤이 발굴되었으며, 60여 개의 카타콤의 길이를 총 합산하면 900여 km(872km)에 이른다고 한다. 기독교도들은 카타콤 생활 속에서 익투스(ι′χθυ′ς: ΙΧΘΥΣ)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물고기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예수(Ιησους) 그리스도(Χριστος)는 하나님의(θεου) 아들(Υιος) 구원자(Σωτηρ)라는 뜻이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상대방이 기독교도인가를 알기 위해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리면서 상대방이 신앙인지 확인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이 숨어 사는 카타콤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카타콤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포도와 종려나무, 양이나 비들기와 같은 도상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박해 속에서 성장했으며, 박해를 받을수록 신앙인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특히 로마의 카타콤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의 소산물이다. 로마의 카타콤은 후세에 서구 세계가 기독교 문명세계로 발전하는데 영성(靈聖)의 큰 진원지가 되었다. 또한 로마가 후세에 기독교 5대 교구 가운데 수교구(首敎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가 로마 교황청의 초대 교황으로 추대되고, 그의 순교지 바티칸에 베드로 성당이 세워져 이를 토대로 로마 교황청이 형성되어 세계 가톨릭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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