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송골(松骨) 세브란스 병상일기 성경책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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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0년 3월 13일 밤 대신고교 국어교사 김 선생 천안 부친 상가에 갔다. 고인 앞에 조문 예를 표하는데 망자의 살기가 내게 확 풍기는 느낌을 받았다.

함께 온 몇 교사들이 고스톱을 칠 때 바라보며 내가 먹는 박카스가 달갑지 않았다. 고스톱을 그만 둔 교사의 승용차에 넷이 타고 서울시청 앞에 내렸다. 지하도를 걷는 내 배가 갑자기 통증이 심하다. 전에 앓았던 담석증 재발인가 싶어 근처 약국을 바라봐도 문이 다 닫혔다. 62번 막차 좌석버스에 앉아 고통을 참으며 화곡시장 정류장에 내렸다. 구토가 심해 근처 변소에 가서 토하고 집으로 달려가 쓰러져 잤다.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배가 칼로 베듯 아팠다. 아내 부축을 받으며 화곡초등학교 뒷길 담벼락을 더듬어 큰길로 나와 택시를 탔다. 

당시 화곡역 근처 성모병원에 갔다. 잠깬 젊은 외과의사가 강한 진통제를 주라고 간호원에게 지시했다. 괜찮을 거라 했으나 더 구토가 심하고 배는 찢기듯 아팠다. 다시 찾은 의사는 다시 간호사에게 엉덩이에 주사를 놓게 하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했다. 새벽 5시경 택시를 타고 아내와 신촌세브란스 응급실로 갔다. 환자투성이로 아수라장 같았다. 아무도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와중에 “남편을 속히 살려 달라” 젊은 의사에게 아내가 말했다. “그 병이 혹 암일지 몰라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진 의사 말에 어머나! 놀란 아내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는 “아주머니 그 성경책이 있잖아요!” 말하며 들고 있는 성경책을 가르켰다. 아내는 마음을 추스르며 “하나님 내 남편 살려 주세요!” 내심 기도하며 성경책을 가슴에 안았다. 

아내는 화성교회 고등부 제자 아버지인 세브란스병원 의사에게 응급실 오 장로 진찰을 전화로 부탁했다. 전화 받은 여러 의사가 달라 붙어 진찰한 결과 나의 병명은 급성췌장염이었다. 두 코에 소 코뚜레처럼 고무줄을 끼워 2층 입원실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다시 외과 6인실로 옮겼다. 외과 환자 5인은 순대까지 사다 먹으며 건강한 환자였다. 내과 환자 나만 신음소릴 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를 도와준 의사가 외과 의사였기 때문에 외과병동으로 임시 입원하게 한 것이다. 다시 4인용 병동, 6인용 내과병동으로 옮겨 입원 치료를 받았다. 입원 한 달만에 담석수술도 했다. 진달래 피는 5월 초 잠깐 퇴원하여 한글나무고등학생모임 여제자 최선희의 주례도 서교동 청기와예식장에서 서 주었다. 병세가 좋지 않아 5월 말에 재입원하여 한달 더 치료를 받게 되어 나는 다 합쳐 두 달간 세브란스 병상 나그네였다. 그간 우리 화성교회에서 장경재 담임목사님을 비롯 온 성도들이 심방해 주었다. 김한수 교장님을 비롯한 대신중고 교사들, 제자들, 한글나무제자들 그밖에 나를 아는 벗들 나의 안열 혜림 세혁 자녀들 오동해를 비롯한 동희 성희 상희 형제들, 친지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쾌유를 비는 심방을 해 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특히 하석임 존경하는 어머님 기도와 사랑에 깊이 감사 드린다. 가장 많이 심방해 주신 화성교회 개척하신 고 장경재 목사님 설교와 기도는 잊을 수 없다. 세브란스 원목실 최금자 전도사님 자주 오신 심방 기도의 힘도 컸다. 원목실 목사 전도사님들 심방기도에 감사 드린다. 입원 중에 재건축중이던 우리집도 다 지어 기쁘게 입주하게 되었다. 나를 심방왔던 고교 절친한 친구 이증모가 먼저 하늘나라 가서 슬펐다. 나의 침대 밑에 자며 나를 극진히 간호한 아내 안송희 권사가 한정없이 고맙게 생각된다. 내 병을 낫게 해 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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