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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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크리스챤 신문 및 대광학교 ④

`크리스챤’ 신문 창간에 큰 기여

기도로 심장병 극복 대광학원 부임

조국·민족·학생들 운명 위해 기도

어머니들, 조국 위한 길 아들들 격려

<한국 기독교 복지회 정관>

1. 본회는 한국 기독교 복지회라 칭한다.

2. 본회는 한국 사람의 힘으로 한국의 불행을 덜기 위하여 조직한다.

3. 본회는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운영되며, 이사회의 선거에 의해 임원이 선정된다. 임원은 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및 간사이다.

4. 중앙위원회는 50명의 정원으로 하며, 결원시에 중앙위원회에서 보선할 수 있다.

5. 중앙위원회는 매년 정기총회를 개최하며, 필요에 따라 의장이 이를 소집할 수 있으며, 의장은 자동적으로 회장이 이에 임하며, 회장 유고시에는 부회장이 대리한다.

6. 이사회는 매월 1회 회집해 사업을 검토하고 보고를 접수하며 총무의 임면을 주관한다.

7. 총무는 사업을 추진하며 예산을 집행하고 집원의 임면과 재산의 관리를 주관한다.

8. 중앙위원의 임기는 없다.

9. 이사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3분의 1씩 교대 시무토록 한다. 임원의 임기도 3년이다.

10. 총무 및 직원의 정년은 65세로 하고 매 정년 3개년 전에 후임을 지명 훈련케 한다.

11. 이사는 중앙위원 중에서 선출한다.

12. 본회의 예산, 결산 기타 재산의 처리권은 이사회가 이를 가진다.

<한국 기독교 복지회 사업 계획>

1. 모금 사업 : ①월정 회원제 모금 ②수시 회원제 모금 ③유지찬조금 모금 ④재산을 통한 모금 ⑤사업을 통한 모금

 2. 아동복지 사업 : ①아동 양육비 보조 ②아동 교육비 보조 ③아동 장난감 보급 ④아동도서 보급 ⑤아동 전도 운동

 3. 경로복지 사업 : ①경로회 조직(O.M.C.A.) ②경로비 보조 ③경로 기구 보급 ④경로 문서 사업 ⑤경로 전도 사업

<한국 복지회 휘장>

은색 : 일반 회원

금색 : 경로 회원

녹색 : 아동 회원

<한국 기독교 복지회 표어>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3. 우는 자로 함께 울고, 웃는 자로 함께 웃자.

 

<함께 아동복지회>

휘장 : (미정). 총무 : 황광은. 이사회 : 조향록, 고응진, 김동수, 안성진, 맹기영, 주선애, 김정순, 조덕현, 유영희, 성갑식

황광은 목사가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 교계를 통해 이룩해 놓은 큰 공로 가운데 하나가 <크리스챤> 신문을 창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새문안교회 장로인 김대보(金大寶) 씨의 자금을 유도해 1960년에 교계 신문을 창간하게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김대보 장로를 설득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는 꼭 바쳐야 하오. 굳이 교회에 내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는다면, 교계 신문을 하나 창간하도록 하시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바치는 한 방법이오.”

<크리스챤> 신문은 1960년 7월 9일 창간호가 발행인 김대보, 편집인 황광은으로 발행되었고, 발행목적을 “크리스챤은 교회에 순종한다. 그러나 불의와 세속에는 용감히 항거한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이며 크리스챤의 주장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광고등학교 교목

난지도 소년시에서 나올 때 5년 정도 교회에 봉사하고 다시 사회사업을 하리라던 그 기한이 찼다. 그러나 황광은 목사가 얻은 직장은 사회사업 계통이 아니었고 대광학교 교목 자리였다. 학교에 새로운 바람을 넣기에 노력하던 이창로 교장의 초빙을 받게 된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 떠나기 얼마 전 그는 심장병을 몹시 앓았다. 세브란스에 서너 달 입원했어야 했고, 병원에서 완치를 보지 못해 다락원에 가서 기도 생활로 병을 고쳤던 일이 있다.

그 때도 오히려 당황해 갈피를 못 잡던 것은 주위 사람이었고, 황 목사 자신은 태연하게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로 기도를 통해 나음을 받아 대광학원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봄에 4‧19혁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울 거리는 쓰러진 학생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고, 서릿발 같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다.

대광학교 교정에는 이미 세 번째 돌격을 한 젊은 사자들이 친구들의 죽음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며, 최종적으로 대대적인 데모를 벌이자고 교정에 모여 있었다. 교직원들은 이 이상 더 희생을 낼 수 없다해서 그들을 만류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또 어느 사이에 어머니들이 달려와 아들들의 안전을 빌면서 마음 죄며 일의 추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복 경찰관은 교문 밖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앞에는 가죽점퍼를 입은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 젊은 사자들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선생님들의 간곡한 만류도, 어머니의 눈물 어린 모습도, 그리고 삼엄한 계엄의 총부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흥분과 분노의 외침소리만이 높아갈 뿐이었다. 이제 이창로 교장조차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 교목이던 황 목사는 단 위에 올라섰다. 그는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일어선 순수한 젊은이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황 목사는 단에 올라가 손을 높이 들고 학생들로 하여금 머리 숙이게 하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부정과 부패는 정치인들이 저질러 놓고 피는 애매한 젊은이들이 흘려야 되는 현실, 이렇듯 나이 어린 학생들마저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만 하는 이 나라의 비통하고 안타까운 상황, 이 속에서 조국과 민족과 이 학생들의 운명을 보살펴 달라는 내용의 기도였다. 기도하는 목사가 울었고, 머리 숙인 학생들이 울었고, 주위에 둘러섰던 어머니들도 울었다.

기도가 끝나자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들을 향해 “가거라, 조국의 위해!” “차라리 죽어도 불의를 고발하라!”하고 격려를 하게 되었다.

앞장을 선 것은 교직원들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이끌고 질서정연하게 교문 밖으로 나갔다. 이 기세에 눌린 경찰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교장 선생을 선두로 대광의 젊은이들은 당당하게 서울거리를 누볐던 것이다. 이 때 황 목사도 데모대를 호위해 행진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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