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삼전도 굴욕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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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1623)으로 명과 후금에 대한 중립외교를 중시하던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이 친명(親明) 배금(排金) 정책을 쓰자, 정묘호란(이조5, 1627)을 일으켰던 후금이 청(1636)으로 성장하여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면서 조선에 두 번째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인조14, 1636). 무려 10만 대군을 이끌고 청 태종이 직접 침입해 왔다. 그러자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1만3천여 명의 우리 군사가 있었고, 남한산성은 10만여 명의 청군에 포위가 되었다. 우리 군사는 1636년 12월 13일부터 항전을 하다가 군량미를 비롯한 생활물자의 차단으로 추운 겨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최명길(崔鳴吉, 이조판서)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 예조판서)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主戰派)가 논쟁을 거듭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게 대두하여 성문을 열고 45일만에 항복하였다(1636. 12. 28.~1637. 2. 24). 이로 인해 삼전도(三田渡) 굴욕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통해 청 태종에게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청의 요구 조건은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지는 예를 갖출 것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낼 것 △덕망 있는 학자인 삼학사 셋을 볼모로 보낼 것 등이었다. 인조는 이 모든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평소에 빨간색 곤룡포를 입었다. 하지만 그날은 곤룡포 대신에 남색의 신하복을 입고, 수행원 5천 명과 함께 태종에게 다가갔다. 청 태종은 자신의 발아래 단을 만들고, 9층의 계단을 쌓고, 계단 주위를 황금색 휘장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커다란 파라솔을 세워 두었다. 몇만의 군사들이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 자신은 맨 윗 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인조에게 백걸음을 걸어서 세 번을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 그리고는 풍악을 울리며 잔칫집 분위기를 만들었다. 인조가 의식을 치르고, 끝나갈 때쯤 청 태종은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인조에게 선물했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이다”라고 말하였다. 인조가 그 옷을 입고 감사의 인사로 세 번 절을 해야만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청 나라가 조선에 온 이유, 조선이 항복한 일, 청나라가 받아들여 준 것을 정리해서 비석을 세우라고 했다. 이것이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로 원래 삼전도에 있던 것을 지금은 석촌동으로 옮겼다. 훗날 이 일을 삼전도 굴욕이라 했다.

우리는 이런 뼈아픈 굴욕의 역사를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북한의 겨레들 뿐만아니라, 오고 또 오는 수많은 우리 후손들은 항상 깨어 국난을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명심해야 할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變化)를 정확히 파악하고, 당리당략을 넘어 그 대외변화(對外變化)에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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