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정봉덕 장로 (23)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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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다’화평하게 사는 것만큼 큰 복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돕는 것은 매우 보람된 일이다. 하지만 한 번의 도움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은행처럼 단순히 돈을 대출해 주는 곳이 아니라 그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돕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 중요한 것은 후속 관리이다. 다시 말하면 대출을 받은 이들이 대출금을 잘 갚을 수 있도록 상황을 살피고 지속적인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 지역 주민이 새로 개발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모르고 월세가 낮다는 이유로 그곳으로 식당을 이전한 집사가 있었다. 그는 대출금을 다 갚았지만, 그의 개인적 삶이 나아지지 않았기에 나는 이것을 사역에 실패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2012년부터 나는 이 일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믿을 만한 후임자를 찾았다. 다행히 총회 사회부 총무 시절부터 나와 동역했고, 그 후 총회 사회부 총무와 용산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류태선 목사가 내 후임으로 상임이사의 책임을 맡아 주었다.

현재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은 이사장 김종익 목사(염산교회 담임)와 상임이사 류태선 목사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건실하게 발전하고 있다. 2015년 11월, 자산은 4억 원을 초과하였고, 2016년 말까지는 5억 원에 이를 전망이며, 누적 대출 건수는 112건에 달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경제 양극화 상황 속에서 가계부채 1천165조 원(2015년 3분기)을 넘어섰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연 30% 이상 되는 고금리의 제2금융권이나 사채에 시달리고 있는 이때에,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막에 오아시스와 같이 혹은 가뭄에 단비와 같이 가난한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일에 작은 씨를 뿌린 보람을 느낀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소중한 일에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만남의 복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흔히들 가장 행복한 삶의 조건으로 오복(五福)을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다섯 가지의 복이다. 많은 사람들의 첫 번째 소망인 오래 사는 것,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사는 것, 큰 병 없이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 이웃을 향한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이룬 마지막에는 평안히 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골고루 누리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복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큰 복의 내용으로 ‘만남’을 생각한다. 산다는 것은 곧 ‘더불어 살다’이기에 마음 맞는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짝을 이루고 손을 잡으며 화평하게 사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나의 가장 오래된 벗들이 모두 나와 화평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부지런한 아내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생활이 평화로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정을 안정적으로 돌봤던 아내의 노력이 가장 컸다.

염천교회 교인의 소개로 만나 1960년 12월 10일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해 겨울, 나는 가정을 꾸렸다. 염천교회 김성수 목사의 주례로 식은 올렸지만, 워낙 돈이 없던 시절이라 신혼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처음 총회 전도부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했을 때 월급이 2만 환이었다. 1956년 당시 2만 환은 서대문구 홍제동 산꼭대기에 방 한 칸 겨우 얻을 전셋값밖에 되지 않는 액수였다. 제대비 1만3천 환이 전부였던 나를 부족함 없이 선하게 이끄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로 시작한 신혼생활이었다. 내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아내가 이런저런 일을 해 살림을 돕기 시작했다. 지금껏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 네 명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내의 억척스러움 때문이다.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이후 56년의 결혼 생활 동안 이사를 네 번 밖에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그러한 것에 대해 조금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내의 생활 철학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이다. 아내는 자신의 철학을 삶에서 증명하기라도 하듯 눈이 떠 있는 동안에는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는다. 무슨 말로도 말릴 수가 없다. 아내에게 허락되는 휴식은 오직 잠자는 동안이 아닐까 싶을 만큼 곁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이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넷이나 되는 애들을 매일 저녁 목욕시키고 옷도 깨끗하게 빨아 입혔다. 보통은 자신이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왔으면 딸이나 며느리에게도 비슷한 수준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아내는 시집간 딸의 집에도 자주 가지 않고 며느리에게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내가 무덤덤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7남매의 막내면서도 가까운 가족부터 먼 친척들까지 생일이나 집안 대소사 날짜를 다 기억하여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겨 보낼 만큼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지 모른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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