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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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창의 인생 – 기도 후원자들이 만들어준 큰 언덕 (1) 

“훈계하신 평범한 말씀, 평생 삶에 중심 잡아줘”

숨돌릴 겨를 없이 한평생을 살아온 박래창 장로. 교회학교 교사 40년, 장로 28년, 사업가 40년의 그의 일생은 두려움없이 신실한 장로로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한 몸에 받아왔다. 사업과 교회일로 바쁘면서도 노회 부노회장, 총회 회계, 한국장로신문 사장, CBMC 회장, 한국복지재단 이사장, 그외 해외선교 등 그가 관계된 일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으로 성장 발전했다. 동료들과 후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뜻에서 박 장로의 인생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조각구름의 징표

엘리야가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눈에 보인 것은 손바닥만 한 조각구름뿐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하며 ‘큰 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곧 비가 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왕상 18:41~44)

흙먼지가 이는 논둑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손에 든 강아지풀이 한들한들 춤을 춘다. 기분도 그처럼 한들거리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바로 며칠 전에는 지금 이 길을 반대로 걸었다. 그때는 노을을 바라보며 걸었고 지금은 노을을 등지고 걷는다. 도착하면 서모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나를 할머니 댁으로 보내면서 “여긴 너무 비좁고 식구가 많으니 형이 있는 곳으로 가거라”라고 할 때는 그래도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친정집에 더불어 사는 서모로서도 힘들 것이라고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할머니 댁이라지만 돌아가신 할머니 친정 쪽이어서 이전에는 왕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최씨 집안이다. 눈치가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서모의 친정집도 그보다 편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형님과 같이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오래 못 버티고 다시 떠밀려 돌아가고 있다. 형님은 열다섯 나이에 키가 크고 힘이 세 일꾼 한 몫을 하지만 나는 이제 내 나이 열두 살,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이번에 가면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을까. 일 나간 사이에 내가 다시 서모 댁으로 보내진 것을 알면 형은 또 얼마나 괴로워 할까.

옛날 생각이 난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잘 지내던 때의 기억보다 사무치도록 그립게 떠오르는 것은 딱 한 번, 아버지께 종아리를 맞았던 일이다.

아버지는 몹시 엄격하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형과 나는 아버지께 야단맞은 기억이 없다. 매를 맞은 기억도 거의 없다.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 밑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를 아버지께서는 늘 마음 아파하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께 호되게 혼난 적이 한 번 있다. 아버지 서랍 속에는 희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 중에 좋은 파카 만년필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몰래 학교에 가져갔다가 학교에서 제일 힘이 센 아이에게 줘버렸다. 이 일을 알고 아버지는 매를 들고 종아리를 때리셨다.

“너는 앞으로 이 나라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느냐!’”

종아리를 때리신 후,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국가관까지 어린 나에게 길게 말씀하셨다.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종아리를 때리시며 훈계하시던 가장 평범한 말씀이 평생 나의 삶에 기둥이 되어 중심을 잡아주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나는 천덕꾸러기 고아가 아니고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을 감싸고 위로해줬다. 아버지는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그렇게 나를 영혼으로 기르셨다.

몇 년 전, 아흔이 다 된 형님과 그때 이야기를 나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전쟁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모와 함께 피난살이 하면서 이 집 저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그 시절 이야기다.

형님은 지금도 그때의 서럽고 억울했던 기억이 생생한 듯 분노하신다. 남보다 나을 것 없던 할머니 친척집에서 고된 노동을 했던 것보다도 어린 동생이 받았던 구박이 더 서러우셨던 듯하다. 나도 그 시절을 떠울리면 울적하고 외로웠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은 이렇게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고향 풍경과 그 그림을 찢어발기는 듯 처절했던 전쟁의 상흔,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전쟁 뒤의 고생이 뒤섞여 있다. 장래를 생각하기는커녕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몰랐을 뿐, 내게는 엘리야가 본 조각구름과 같은 징표가 있었다. 너무나 미미해서 감지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너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늘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 약속은 아무리 서럽고 슬픈 상황에서도 마음 한쪽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것도 한참 후였지만 말이다.

신앙의 뿌리, 물우리교회

회문산 자락 밑, 고향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운암댐이 생기기 전이라 강줄기는 크고 아름다웠다. 강가에는 수천 년 물길에 다듬어지고 무늬가 진 넓은 바위와 크고 작은 조약돌, 기기묘묘한 몽돌이 어우러진 자갈밭이 3km도 넘게 펼쳐져 있었다. 늦여름이면 바다에서 올라온 팔뚝만한 은어 떼가 강에 가득했다. 수리안전답이 넓게 펼쳐져 있어 흉년 걱정이 없고, 밤나무, 감나무와 문창호지를 만드는 닥나무도 많이 재배해 농가마다 여유가 있었던 이 마을 120호 가량의 대부분이 우리 박씨 집안이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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