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77) 고찬익 장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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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서 목사는 고찬익 장로에 대해서 쓰려고 게일 목사의 영문으로 된 <조선>이라는 책에 고 장로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연동교회에서 그 기록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구전에 의하여 불완전한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고 <신앙생활>(1933년 2권 10호)에 밝혔다. 그 선배란 길선주 목사였다. 길선주 목사와 고찬익 장로는 총회에서 만나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평양성령운동에 적극 동참한 사람이었다.
고찬익이 186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다고 하나 김 린서 목사는 “1875년 5월 10일 그 부모가 경성에 우거할 때 경성에서 출생하여 평양에서 성장한 평양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 부친은 상업으로 생활하였는데 고찬익은 겨우 글을 읽고 쓸 만큼 교육을 받았다. 그는 강직하고 유순하여 타인의 인격을 극히 경애하고 자기의 지조는 굳게 지키는 성격이었다.
1888년 6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기독교청년회에서 파송 받은 게일(J. S. Gale) 선교사는 1891년 8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고 1892년 6월 원산에서 같은 소속의 소안론(W. L. Swallen) 선교사와 함께 봉수대에 선교 구(예수 집)를 개설하고 선교했다.

원산은 1891년 마펫과 게일 선교사가 선교지를 물색하던 중 이곳 원산을 선교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892년 7월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게일이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함경도에서 장로교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894년 북 장로교 선교사 소안론(W. L. Swallen)이 원산에 도착함으로 선교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게일 집은 <예수 집>이라 불렀다. 이때 기독교를 반대하는 원산 사람들은 <예수 집>에 돌을 던져 문을 부수고 “예수 도깨비 나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전도하려고 밖으로 나오면 큰 구경거리나 되는 듯 모여서 웃고 놀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원산은 일찍이 외국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자유항이었으므로 원산 토박이들은 비교적 대인관계가 부드럽고 친절하였다. 원산은 부산 다음으로 개항한 항구로서 그곳에는 세관 사무를 보는 두 영국인이 있었고,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있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전보국까지 두어 무역에 종사하였고, 부산과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일본인 상선 도오꼬 마루와 사쯔마 마루가 있었다. 그때 원산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약 3,000호 가량 되었다고 하니까 아마 1만 5천명쯤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일 선교사는 원산 봉수대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였다. 봉수대란 옛날부터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원산 봉수대는 북쪽으로 약 40리쯤에 있는 문천 옥녀봉에서 올린 봉화를 받아 문평 망덕 산에서 전해 주면 그것을 봉수대에서 다시 받아 남쪽 안변과 고산과 삼방 고개를 넘어 중앙 정부에 전해 주던 전령의 요지였다.
원산 봉수대는 송도원과 원산 번화가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이다. 거기에는 또 한국 정부의 감령이 있고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이 근처에 올라서면 눈 아래로 새로 열린 항구와 송전만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반도를 넘어 허허 동해 바다가 열린다.
게일 선교사는 1893년 성탄절에 처음으로 한국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성탄 선물로 서양 과자, 손수건, 서양 접시 같은 것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게일 선교사의 집은 <예수 집>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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