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1909년에 전개된 백만인 구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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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일즈, 아주사, 평양, 세계 3대 성령운동의 청교도 전통 맥락

20세기로 접어들면서, 1900년대 첫 10년 이내, 세계 3대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의 고장 영국 웨일즈에서 1904년 성령운동이 일어났고, 이태 뒤 190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에서 성령 불이 떨어졌으며, 그 한 해 뒤 1907년 구한국 평양에 성령의 불이 강타했다. 영국과 미국과 한국, 청교도의 전통과 전파가 역력한 선교 노정이 이 세 나라 사이에 뚜렷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런던선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였는데 바로 이 영국 웨일즈 출신으로서 하노바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회중교회는 청교도 전통의 가장 강력한 교회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상주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영국이 본향이며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역시 청교도 전통이 강력하게 살아있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로 알려진 뉴브런스윅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에 파송된 첫 목사선교사였다.

중국에 있다가 온 알렌은 의료선교사였고, 본래 미국에서 한국에 처음 파송을 결정한 헤론 역시 의료선교사였다. 첫 목사선교사의 영예는 고스란히 언더우드의 것으로 돌아간 셈이다. 첫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목사선교사로되 상주하지 않았다. 본래 중국 파송선교사이나 한국 선교의 열렬한 헌신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 와 자신이 탄 배를 불 지르고 돌을 던지고 창칼을 들고 달려드는 평양 군민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다가 순교했다.

2. 평양 성령 불 이후 벌어진 백만인 구령운동

1907년 평양에 떨어진 성령의 불은 한국을 신생 기독교강국으로 주조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경이로운 선교지’ 한국교회의 성장은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1904-5년에는 교회 321개, 세례교인 9,761명, 원입교인 30,136명, 헌금 13,528.67$였다. 이것이 1907년 현재 자립교회 1,000개 이상, 약 30,000명의 세례교인, 120,000명 이상의 학습교인, 헌금 금화 약 80,000$로 경이로운 성장을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미래 비전은 확고했다. “또한 덧붙이자면 120,000명은 상당히 많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13,000,000명 중에서 12,880,000명이 아직 복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 앞에 복음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이 기회를 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마땅한 의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이러한 갈급한 외침은 곧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2만 명으로 족할 문제가 아니었다. “백만 영혼을 예수님에게로!” 이것이 외교권과 경비권을 박탈당하고 곧 주권마저 잃게 될 운명에 놓여 있는 한국교회가 벌인 문제의 본질을 꿰뚫은 구국운동이었다. “금년에 백만 명을 구원해 줍소서. 금년에 백만 명은 과하지 않으며 능하신 도 족하야 죄인을 구하니 그 도를 성신께서 깨닫게 합소서. 금년에 백만 명을 구원해 줍소서. 참 도를 온 대한에 퍼지게 하소서.”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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