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편]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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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43) 

 

배위량이 1893년 4월 28일 금요일 오전에 상주에서 쓴 일기에 보면 낙동에서 상주로 오는 과정과 상주에 도착해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아래와 같이 제공한다. 

<4월 28일 금요일 오전, 상주> 

[…] 우리는 어젯밤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 마부 한 사람이 몸이 안 좋아 낙동에 남겨두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소년의 건강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진다. 부산을 떠나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건강이 안 좋을 경우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뿐이다. 어제는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다. 우리는 쉴 수 있는 방을 겨우 얻었고, 오늘 오전에는 책을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 

배위량이 상주에 도착한 날은 1893년 4월 27일 밤이다. 그가 1893년 <4월 28일 금요일 오전, 상주>에서 쓴 일기에 “우리는 어젯밤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고 말한 것처럼 낙동에서 상주로 1893년 4월 27일 오전에 출발하여 40리를 걸어 그날 밤에 상주에 도착했다. 1893년 4월 27일 오전 언제 낙동을 출발했는지, 그날 밤 언제 상주에 도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40여리 길이면 너댓시간이면 도달하는 거리인데, 오전에 출발하여 밤에 도착했다면 중간에서 다른 일정으로 시간을 소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배위량이 “상주까지 반쯤 왔을 때, 우리는 김서방이 한 작은 마을의 길가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 것처럼 배위량이 김서방을 만나서 그에게 점심을 대접받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 후 상주로 향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위량 순회전도단은 1893년 4월 27일 오전에 낙동에서 상주를 향해 출발하여 40리 떨어진 상주에 그날 밤에 도착했다. 그때 부산에서 함께 출발한 마부 두 명 중에서 한 사람의 몸이 안 좋았다. 그래서 배위량은 그를 낙동에 남겨두고 떠났다. 마부 한 명이 없다는 것은 그 마부가 말에 실어 왔던 짐을 다른 말에 싣는다는 말이든지 아니면 일행 중 누군가가 그 짐을 나누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만큼 전도 여행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마부가 아프면 곤란한 점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 날로 말하면 운전기사가 포함된 차를 두 대 빌려서 여행하는데, 운전기사 한 명이 병이 든 경우 그 기사가 병 낫기를 기다려 함께 출발할지, 아니면 해야 할 여행 일자가 정해져 여행을 머무를 수 없는 경우 여행 대원들은 먼저 출발하고 운전기사는 병이 나으면 어디로 오라 하고 먼저 출발할지 아니면 그 기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차를 가진 다른 기사를 고용할지에 대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낙동은 나루터가 있는 곳이니 객관이나 객주나 또는 주막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렵지 않게 다른 마부를 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위량은 그 마부를 해고하거나 아픈데도 불구하고 같이 상주까지 가서 그곳에서 같이 쉬자고 할 법한데, 그 마부를 낙동에 남겨두고 전도 여행을 출발했다.    

마부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 동래에서 여행을 출발한 박재용이란 소년의 건강 상태도 점점 안 좋아졌던 것 같다. 그래서 배위량은 “부산을 떠나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건강이 안 좋을 경우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고 하면서 그는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뿐이다.”는 희망을 말한다. 

상주에 도착해서의 형편에 대해서 배위량이 말하는 것을 눈여겨보면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순회전도 여행을 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필자가 만난 역사전공 연구자들은 배위량이 서양 선교사의 신분이기에, 넉넉한 가운데 부를 누리면서 말을 타고 안락한 전도 여행을 했고 잠도 객관에서 관리의 보호를 받으며 잠을 잤을 것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여행자가 위기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행자들이 어느 지역에 가서 천재지변을 당하면 그 여행 국가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통상 개별 여행은 개인이 준비하고 개인의 책임 하에 행한다. 어떤 교회사가는 배위량이 외국 사신들과 벼슬아치들이 묵었던 숙소인 객사 (客舍) 또는 객관(客館)에서 잠을 잤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배위량의 일기에 있는 글을 보면 그 주장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어제는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다. 우리는 쉴 수 있는 방을 겨우 얻었고 […].” 

여행하면서 노숙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어디를 여행하든지 그 날 밤에 묶을 잠자리를 찾는 것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하루 여행길에 겪은 모든 피로를 편안한 잠자리에서 풀지 못하면 병이 들게 되고 더 이상 여행을 하지를 못한다. 배위량 일행은 상주에 밤에 도착했다. 여행하면서 목표로 하는 지역에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일찍 도착한 사람들 보다 자기가 원하는 잠자리를 찾는데, 제한이 있다. 그런데 배위량은 상주에 늦게 도착했기에 잠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쉴 수 있는 방을 겨우 얻었고 […].”라고 말한다. “겨우 방을 얻었다”는 말은 쉽지 않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대변한다. 

전도 여행하면 하나님이 다 예비해 주시기에 그런 걱정은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종종 있다. 삶의 길에 신자들도 종종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실패를 하기도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신자의 삶의 태도가 아닐까? 배위량은 위대한 선교사이기에 하나님께서 다 예비하셔서 좋은 잠자리와 좋은 음식을 미리 예비해 주셨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시지 않았다. 그런데 신자가 살아가면서 배고픈 어려운 삶을 살면, 혹은 신자나 전도자가 힘든 고난의 길을 걷는다면, 그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판단일까? 그런 오류 속에 배위량을 가두는 과오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한다. 집을 떠나면 다 고생한다. 배위량이라고 예외는 없다. 배위량은 상주에서 “겨우 방을 얻었다”고 했다. 방을 얻었다고 했는데 방은 방이지 집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방이다. 그 말은 배위량이 주막 전체를 세내어 같이 일행이 방 한 칸씩 차지하고 잠을 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세 드신 독자 분들은 주막의 규모를 알 것이다. 아마도 배위량 전도단은 방을 한두 개 정도 얻어 그곳에서 5명(상주에서는 4명)이 잠을 자야 했을 것이다. 옛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객사(객관) 또는 객주(客主)에서 잠을 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배위량은 관리도 아니고 외국 사신도 아니었고, 보부상이나, 객상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민간 여행자들이 묶는 주막에 잠을 잤을 것은 명백하다. 아마도 젊은 층의 독자들 중에는 지금 시대에 시행하는 여행을 생각하여 호텔이나, 노보텔 또는 여관에서 잠을 잤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배위량에 대하여 나오는 글이나, 논문들도 그렇게 대부분 글을 쓴다. 그런데 다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배위량은 관리나, 사신이 아니었고 보부상이나 객상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여인숙도 여관도 생기기 전이었기에 민간 여행자들이 묶는 주막에 머물렀다. 

그런데, 사극 영화나 연속극에 나오는 주막은 향수를 자아내게 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실제로 주막에서의 잠자리는 심히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빈대와 벼룩과 이가 들끓던 시절이었다. 주막은 많은 사람이 머물렀던 곳이고 그 시대에 세탁이나, 소독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런데 그런 방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노숙을 하든지 다른 민가에 신세를 지든지 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전도 여행을 하는 전도자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자의 발을 아름다운 발이 되는 것 같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발을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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