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가정파괴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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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유럽은 많은 사상가들의 출현과 함께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탄생으로 대혼란에 빠졌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는 1883년 독일 프로이센의 트리어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가운데 루터교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본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도 전공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노동자들의 빈곤생활과 자본주의 모순을 발견하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정당화하고 선동함으로서 국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세계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갈라놓는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러시아와 중공의 존재는 마르크스의 충실한 후계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가난한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평등사회를 추구하며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가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론은 오히려 공산독재의 수단으로 악용됨으로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했다. 늘 가난과 도피생활 속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연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는 헛된 망상에 빠져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평세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늘 가난과 도피생활 속에 살았으며 부모를 저주하고 사후에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오로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고향을 다녀갔을 뿐이다.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도 불참했지만 아내의 상속은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생 동안 엥겔스에게 빌붙어 살았다.

오늘날 우리가 혀를 차며 목격하는 사회주의자 리더들의 뻔뻔하고 표리부동한 행태는 공산주의 창시자 때부터 원래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또한 마르크스는 평생 알코올 중독자였으면서도 목욕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 위생이 매우 불결하고 몸에서 악취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그가 공산당 선언을 집필할 때(1948년)는 머리에 종기가 많이 생겨서 고름을 짜내는 고통 속에 책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애정도 없고 가정이 주는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불행한 사람 같았다. 늘 자신의 가족을 저주하며 ‘결혼은 인생의 가장 어리석은 낭비’ ‘가정 없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했다. 그의 가정생활이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가 이토록 가정을 비판하고 결혼 자체를 금기시했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최악의 스토리가 있다. 마르크스는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4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모두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했다. 결코 가난하지 않던 마르크스의 사생활을 고려하면 그가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살아남은 3명의 딸중 두 명은 아버지의 사회주의 이론에 심취했는데 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둘째 딸인 제니 로라는 마르크스의 열렬한 제자였던 남편과 동반자살을 했다.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버지는 아들 마르크스에게 ‘악마에게 지배받는 놈’이라고 비난했고, 동역자인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가리켜 ‘일만 악령의 괴물’(monster of ten thousand devils)이라고 불렀다. 8세 때에 죽은 그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친애하는 악마님’이라고 아버지를 호칭했고, 그의 아내는 마르크스를 ‘사악한 악당’이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전기를 쓴 로버트 페인은 마르크스를 동경하는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악마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평했다(지저스 아미 2022,4). 이렇게 볼 때 그는 완전히 미친 ‘가정파괴범’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바로 이런 배경가운데 창안된 것이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전 육군정훈감

• 베트남 선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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