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한남대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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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오 교수는 학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종합대학 신청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전 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한 뒤 4개 학부(문학, 이공(理工), 경상, 법정)와 2부 계열을 대학으로 격상하고 철학, 정치외교, 건축공학… 등 몇 개 학과 신설을 포함해서 종합대학 신청을 했는데 그해 9월 교육부는 몇 개학과 신설만 허락하고 종합대학은 하락하지 않았다. 오 학장은 분리 후 처음 시도였던 종합대학 신청이 좌절되자 교수를 더 충원하고, 교육 시설 확장으로 ‘성지관(聖志館)’을 착공, 이공학관을 준공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 1984년 초 다시 종합대학 인가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학생회는 오 학장의 능력이 미숙하다고 믿지 않았다. 당시는 학생회나 교수회는 대학 자율화를 외치며 대학행정에 과감히 간여하고 있을 때였다. 정치적으로 5공 독재정권은 유화정책으로 중·고교생의 두발과 교복을 자율화하고, 퇴직 교수와 제적되었던 학생들을 대학으로 돌려보내는 때여서 국가를 상대로 하는 데모 외에는 교내 문제는 자체 해결하도록 정부는 어느 정도 방관하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 특히 한남대의 학생과 평교수들은 “서울이 ‘주’, 대전이 ‘종’이 되는 주종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라고 서울까지 가서 농성하며 분리 투쟁한 개선장군들이었다. 그들은 이사회가 같은 재단 산하에 ‘대전 숭전대학교’를 따로 두는 정관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교육부에 두 캠퍼스의 분립 독립 신청서를 제출하게까지 압력을 가한 장본인들이었다. 하지만 교육부가 한 재단 아래 있는 두 캠퍼스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개정안을 반려하자 ‘같은 재단하 2개교 운영안’을 ‘재단 분리를 전제로 한 분리’넵네로 수정하여 교육부가 승인하게 한 개선장군들이었다. 그 결과 대전캠퍼스가 ‘학교법인 대전기독학원’으로 분리된 것이다. 한남대학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분리를 쟁취한 그들이 이 대학의 행정에 간여하지 않을 단체들이 아니었다. “파행적인 보직 인사를 자행하여 학내를 소란케 하는 학장은 물러나라. 숭실과 통합 옹호자였던 오 학장은 물러나라.” 이렇게 외치며 드디어 1984년 5월 말에 학생들은 학장실 복도를 메우고 농성을 시작했다. 오 학장이 통합 옹호자라는 말은 숭전대학교의 고범서 총장이 물러나고 아직 후임 총장이 없을 때 서울캠퍼스는 대학원장이던 김주현 교수가 총장직무대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주현 대행이 갑자기 대전캠퍼스의 부총장으로 있던 박종민 이하 교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수리하고 오해진 교수를 부총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오 학장은 숭전대학교의 높은 보직은 도맡아 하며 통합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전캠퍼스에 보직을 맡길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고 그들은 다 돌아가며 보직을 맡았다. 따라서 굳이 오 학장만 통합 지지자였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긴급 교수회가 소집되었지만 요란한 소리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교수 중에도 오 학장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정운 교목실장은 10년 이상 재직한 교수들을 모아 대학을 구할 대책 마련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무성한 목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남대학은 옛날의 기독교 대학이 아니었다. 1976년에 40여 명이던 교수요원은 1984년에는 150여 명으로 늘어 목사의 추천만으로 취직하고 세례는 취직 후 천천히 받기로 한 분들이 많았다. 어떤 분은 자기가 교회에 나가는 날보다 목사가 자기집 심방오는 날이 더 많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학생 소요문제는 교수들이 설득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오 학장은 나에게 말했었다. 학생들이 떠나라고 하면 자기는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고. 나는 잘한 생각이라고 칭찬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훗날 후회했다.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자기는 누명을 벗고 싶고, 자기를 모함한 교수도 자기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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