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17)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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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전후한 시절 ①

고아원 생활을 향수처럼 생각

광복 후 조국·교회 위해 일하기로

신의주 학생사건 등 정국 어수선

태은·광은 형제 월남키로 작정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제일 어린 것들이 머리를 꾸벅 숙이는 거기에 사랑과 연민과 동정을 오히려 얼굴에 담뿍 안은 유치원 또래에서 고등학생까지. 그리고 가난한 모습에다 언제나 미소를 짓는, 그러면서도 무엇이나 알고 있는 너그러운 선생님들, 그런 분위기가 나를 대해줄 때, 나는 거기서 바로 고향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 그런 사람과 그런 환경이 내 고향이었다.

억울한 일에도 반발을 몰랐고, 괴로운 일에도 부정을 모르던 그때…

글은 여기서 끝나 있다. 그가 무슨 말을 더 쓰려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 짧은 메모에서 우리는 황광은 목사가 고아원 생활을 하나의 향수처럼 생각했었다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다.

조국 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황광은은 고향 용암포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맞았다. 희망과 기대로 그의 가슴이 설레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과 교회를 위해 일하자!

그는 이렇게 혼자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의 정세는 그렇게 쉽게 독립의 길을 향해 치닫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암담해지기만 했다. 북위 38도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더니, 날이 갈수록 공산주의자들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조국 광복을 맞이하자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에 대항해 용암포와 신의주에서도 기독교 세력이 단합했다. 하향해 용암포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함석헌(咸錫憲)을 지도위원으로 추대했고, 김득산 목사와 이기혁(예장 총회장 역임) 목사를 중심해 평안북도 일대에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조선민주당은 평양 장대재 교회 장로인 민족지사 조만식(曺晩植) 장로를 중심한 정당이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신의주에는 소련군이 강화되었고, 용암포에는 공산당 골수분자인 이용흡이 파견되었다.

“조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비단 황광은뿐이 아니었다. 모든 크리스천과 식자들은 조국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자 숙어인 ‘풍전등화(風前燈火)’란 말을 연상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3‧7제, 종교 탄압…

이렇게 착착 억압 정책이 진행되어 나가는 도중에 마침내 ‘신의주 학생의거’가 터지게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동중(東中) 학생들을 중심해 어린 학생들은 맨주먹으로 소련군에 대항했다. 돌팔매질을 하면서 반공을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소련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응수했다. 수많은 어린 꽃들이 피를 흘렸다.

이른바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지게 된 도화선은 용암포에서 일어났다.

11월 20일, 용암포에서 학생들의 의거가 터졌다. 발단은 용암포 수산학교 폐지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성이 강한 수산학교를 폐지하고 거기에 적위대 병사들을 진주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항해 수산학교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세학교 학생들도 그 의거에 가담한 것이다.

또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이 무렵의 상황에 대해 이도명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적인 조국 해방을 맞았다. 일본 국왕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집에서 뛰어나와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태극기의 물결이 용암포 온 시가를 뒤덮었다.

용천군 시골 농촌에서 은신 중에 있던 함석헌 선생이 두루마기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나타나 군중 앞에 섰다. 그를 앞세운 만세 행진은 참으로 감격적이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용암포 수산학교 사건으로 시발된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조선 민주당 사건 등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감시를 받고 있던 황태은 장로는 용암포 사건 이후 황광은 목사 등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황광은은 격동하는 정세를 고요히 정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1월 24일에 형 태은 장로와 함께 남시(南市)로 피신했다. 그러나 거기도 피난처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천(宣川)으로 내려와 백영엽(白永燁) 목사를 만나보았으나 별 묘안이 없었다. 끝내 평양까지 이르러 조선민주당 본부에 들렀으나, 이미 공산당이 모든 조직에 침투해 행세하는 터라 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는 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안악까지 흘러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안악도 피난처가 되지는 못했다. 신의주 공산당 지령이 안악에까지 도착되어 있었다. 피할 곳이란 이남밖에 없었다. 태은과 광은 형제는 월남하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194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삼팔선을 넘어서

이북 피난민들이 대부분 월남하는 코스는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청단(靑丹)으로 가는 루트였다. 광은 형제도 그 루트를 따랐다. 형 태은 장로는 월남하기 위해서 모아 두었던 돈 8만 원을 1만 원씩 여덟 다발로 만들어, 전대에 넣어서 광은으로 하여금 허리에 차게 했다.

그들 형제가 청단에 닿은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청단을 경비하고 있는 것은 미군 헌병이었다. 그들은 피난민을 가장한 공산당 공작원들의 공작금 유입을 막기 위해서 1인당 5천 원 이상의 금액 지참을 엄금했다. 피난민의 숫자가 100여 명이 되자 트럭에 태우더니 개성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간단한 심사와 소지품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개성에 도착해 보니 미 헌병의 검사를 받기 위한 행렬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여러 루트를 통해 월남한 피난민들을 한곳에 모아 검사하는 듯했다.

태은 장로는 무사히 검사를 끝마쳤다. 그는 어서 광은도 무사히 검사를 통과해 함께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광은의 차례가 되었다.

미군 헌병은 광은의 몸을 수색하더니 “오오!”하고 묘한 소리를 질렀다. 광은의 허리에 있는 전대를 발견한 것이다.

“원, 투, 드리…”

미 헌병은 광은이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에서 만 원짜리 다발을 하나씩 꺼내어 옆에 서 있는 헌병에게 던져 주며 셈을 세고 있었다. 옆의 헌병은 그것을 공중에서 받으며, “포오, 파이브, 식스…”하고 복창하고 있었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돈 한 푼 없이 서울 가서 어떻게 살아간담.’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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