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50) 배위량 순례단의 역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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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 안동까지(1)

배위량은 1893년 4월 27일(목) 아침에 낙동을 떠나 순회전도 여행길을 걸어서 그날 밤에 상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상주에서 4박을 한 후 5월 1일(월) 예천 용궁으로 길을 떠나 예천 용궁에 도착했다. 예천 용궁에 그날 언제 도착했는지에 대해서 그가 일기에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리처드 베어드는 배위량이 5월 1일(월) 예천 용궁에 도착해 일기를 쓴 때에 대해 “5월 1일, 월요일 밤 – 용궁 읍내”라는 표제어로 밝히고 있다. 그가 5월 1일 어느 경점에 용궁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5월 1일에 용궁에 도착하고 일어난 일을 아래와 같이 그날 밤에 정리했다.

<5월 1일, 월요일 밤 – 용궁 읍내>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 훨씬 좋다. 

하인 두 사람이 병이 나서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서 지체하였다. 

몰려오는 사람들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해서 경비 한 사람을 세워줄 것을 지방 관리에게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외국인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서 씨는 이곳 사람들을 2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나누어줄 수 있는 대로 많은 책을 배포하였다. 

지방 관리는 예의가 바르고 친절해서, 여러 번 우리를 불러서 우리가 요청한 것을 처리해 주었다. 그에게 말 한 필을 7달러 곧 670냥을 받고 팔았다. 

우리는 지방 관리에게 마부를 책임지고 치료해 주도록 부탁하고 상주를 떠날 수밖에 없다. 마땅한 다른 방도가 없다. 그는 고열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없었고, 약도 거의 떨어졌다. 사동은 감기에 걸렸지만, 좀 나아졌다. 상주에서 다른 마부를 10리에 10전을 주고 또 음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고용했다.

위의 이 일기는 배위량의 아들인 리처드 베어드가 편집한 책에 들어 있는 배위량의 일기이다. 그런데 5월 1일에 용궁에서 쓴 일기를 이상규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는 아래와 같다. 

<5월 1일, 월요일, 용궁읍내

(Ryonggyoon Umnai)>

두 하인이 병에 걸려서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서 지체했다. 몰려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하인 한 사람을 세워두도록 관리에게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외국인들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서 씨에 의하면 이곳 인구는 2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방(pang)은 아주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여러 번 와서 우리가 요청하는 것을 해결해 주었다. 나누어줄 수 있는 대로 많은 책을 분배했다. 상주는 아마도 부산보다는 서울에서 오기가 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마부를 상주에서 이방이 보살펴주도록 맡기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고, 우리가 가진 재정으로는 이곳에 계속 머물 수가 없다. 약도 거의 떨어졌다. 데리고 다니는 소년은 감기에 걸렸으나 약간 좋아졌다.

우리는 말 한 마리당 7달러 곧 670냥씩을 받고 이방에게 팔았다. 오늘 상주에서 동쪽으로 70리 떨어진 이곳 용궁읍내에 도착했는데, 성(城)이 없는 작은 읍내였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났는데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상주에서 다른 마부를 10리당 10전을 주고 또 음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고용했다.

리처드 베어드는 <5월 1일, 월요일 밤 – 용궁 읍내>란 표제어를 그날의 일기 머리에 붙였다. 그러나 이상규가 번역한 일기에는 <5월 1일, 월요일, 용궁읍내(Ryonggyoon Umnai)>라고 나타난다. 리처드 베어드는 배위량이 용궁에서 일기 쓴 때는 ‘월요일 밤’이라고 특정했지만, 이상규의 일기 번역본에는 ‘월요일’이라고만 나온다. 배위량은 5월 1일에 상주에서 출발해 용궁으로 온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배위량의 상주에서 일기는 4월 28일(금요일) 오전에 쓴 것 이외에는 없다. 그가 상주에서 쓴 일기는 낙동에서 상주로 오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과 상주에 도착한 후의 일들을 기록했다. 

그가 상주에서 쓴 일기에 나타나는 상주에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지난 밤 낙동(洛東)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병이 난 마부 한사람을 낙동에 두고 왔다. 지금은 동행하는 소년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일행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병에 걸렸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긴 일이어서 난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의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어제는 이곳에서 장이 열렸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숨 돌릴 여유조차 없다. 오늘 아침 몇 권의 책 을 팔았다. 

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3가지 사실이 명기된다.

1. 우리는 지난 밤 낙동(洛東)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 

2. 우리는 병이 난 마부 한 사람을 낙동에 두고 왔다. 

지금은 동행하는 소년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일행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병에 걸렸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긴 일이어서 난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의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3. 어제는 이곳에서 장이 열렸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숨 돌릴 여유조차 없다. 오늘 아침 몇 권의 책 을 팔았다. 

위의 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적시한다.

1. 낙동에서 출발해 상주에 도착한 것.

2. 순회 전도 여행에 같이 했던 일행의 상황.

3. 상주에서의 일어난 일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도 배위량의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5월 1일(월)에 용궁에서 쓴 일기에는 상주에서 일어난 일을 더 자세하게 기록한다. 이러한 것을 미뤄 보면 배위량도 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보편적인 인간은 모두 기계처럼 살지 못한다. 배위량은 대단히 위대한 인간 승리자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지 모든 일에 완벽하거나, 거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행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위대한 자신의 단면을 드러내었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일기를 몰아서 며칠 것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빼 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간단히 메모 정도로 그치기도 했다. 벌써 130여 년 전의 일이라, 모든 일에 시간을 들이면 자기의 뜻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와 같은 시기도 아니고 호롱불에 불을 밝히던 근세 초기보다도 더 이전 시대이니 일기를 쓰는 자체도 어려울 수 있었고, 또 여행 시간에 쫓겨 걷거나 말을 타고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은 여행자 신분이니 더욱이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배위량의 일기를 읽고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완벽해 보이는 그의 모습 속에서 그의 허점을 보면서 인간적인 동질성을 느끼게 되었고 위대한 일생을 살았던 배위량의 인간적인 소탈함을 관찰하면서 그의 삶과 사역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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