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산 자와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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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지난날의 역사를 고찰하다 보면, 한 생애를 멋있게 지조와 양심에 따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예컨대, 일제시대를 돌이켜 보면, 한쪽에서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를 하는 애국지사들도 많이 있었다. 반면에 이 나라가 일본에 짓밟히고 만신창이가 되든지 말든지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만 살고자 발버둥 치던 악랄한 친일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일신의 영광만을 생각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으나 영혼이 죽은 사람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Socrates)는 그의 제자 플라톤(Platon)이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증(Apologia Socratis)」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부와 권력과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Psyche)의 만족에 있다고 하였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나는 천 번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의 길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독배의 길을 갔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한 생애를 살다간 소크라테스의 생애 속에는 정의와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것을 죽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보여줌으로써, 후세인들이 두고 두고 그의 정신을 따르고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인 키케로(M. T. Cicero)는 그의 우정론(De amicitia)에서 진정한 친구란 “어려울 때 곁에 있어야 진정한 친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려운 위기가 오게 되면, 친구는 죽든지 말든지 자기만 살기 위해 배신하고 떠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친구는 일시적으로는 어려운 고난을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선교하다가 수난을 당하면서 옥중에서 로마교우들에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로마의 카타콤에서 250여 년 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비겁한 삶보다 죽음을 걸고 진리와 영생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북한의 혹독한 억압 체제에서 독재정치에 불만을 표출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정치범수용소에서 밖의 세상을 나와 보지도 못하고 수난을 당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요덕수용소 생활을 10년이나 겪은 탈북자 전 조선일보 강철환 기자가 쓴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라는 책의 후반부에는 통일 후에 요덕수용소에 한번 가 보라는 것이다. 요덕수용소의 산과 밭의 가는 곳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뼈가 산재해 있는가 그 실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체제 불만세력으로 몰려 수용소생활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어 수용소 여기저기에 파묻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뼈들이 표출되어 나뒹굴고 있는 모양이다. 북한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의인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부분 북한 공산 독재정권의 희생의 제물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북한은 세계적으로 인권을 억압하고 있는 국가로 이름이 나 있다. 3대에 걸친 공산 독재의 폭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 중에 식량난으로 굶어 죽는 아사자가 발생해도 미사일과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고 있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북한은 평등을 강조하는 국가다. 북한 통치자의 생명이 소중하면 주민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에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않는 기색이 보이면 가차 없이 처벌 내지 처형된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독재정권에 앞잡이 노릇하여 일신의 영달을 누린다면, 그런 앞잡이는 살아 있으나 영혼은 죽은 자나 다름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주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행한 대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 역사의 진리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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