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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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창의 인생 – 기도 후원자들이 만들어준 큰 언덕 (3) 

“생사 기로의 절박함… 매순간 감동‧감사 느껴”

힘든 상황서 ‘전쟁’ 때 생각하면 어떤 일이라도 헤쳐 나갈 힘 얻어

지리산 일대에서 국군과 전투경찰의 빨치산 토벌 작전이 점점 치열해졌다. 동네 사람들은 진입한 국군 화랑부대의 인솔을 받으며 피란을 떠났다. 오래 격리돼 있었던 우리 형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쌀자루와 이부자리만 챙겨 집을 나서야 했다.

한밤중에 산을 넘어 숲속 어느 외딴집에 들어서 보니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쇠 솥과 식량을 잔뜩 지고 와 있었다. 우리도 쌀은 조금 가져왔지만 솥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었다. 서모와는 전투 중에 엇갈려 헤어졌고, 형과 나는 그런 짐을 지고 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산속 외딴집 한 귀퉁이에서 잤다. 배고픔이 한계에 달했지만 누가 누구를 챙겨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극한 상황이었다. 다들 친척 사이인 셈인데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우리는 ‘반동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밥 좀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형이 벌떡 일어섰다.

“산 아래 집에 가면 뭐라도 챙겨 올 수 있을 거야!”

내가 말렸지만 형은 막무가내였다.

“걱정 마. 금방 올게.”

형은 그렇게 뛰쳐나갔다. 그대로 영영 못 볼 것 같았지만 차마 따라가지 못했다. 그제야 전쟁터에 있다는 실감이 났다. 포탄이 떨어지거나 총알 스치는 소리에 소름이 끼칠 때도, 산비탈을 오를 때도 형과 함께여서 든든했었다. 혼자 남으니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영원처럼 긴 밤이 흐르고, 간밤의 포탄 소리에 도망가지도 않았는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할 때쯤 형이 돌아왔다. 등에 짊어진 통을 내려 놓는데 뜨거운 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집까지 무사히 간 것도 그렇지만 빈집에 들어가 밥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나도 그렇듯이 형은 한 번도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두운 부엌에서 어떻게 밥을 지었는지 신기했다. 그때 형의 나이가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다행히 날이 덜 추워서 우리는 그 밥으로 사나흘을 연명하며 첫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꽃피는 사랑

그 뒤로도 순창 등지에서 몇 달간 지냈던 피란 시절은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고생이 심했다. 더 이상은 도저히 버티기 어려웠던 형과 나는 전쟁 중이지만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굽이굽이 꽤 높은 성미산 깔재고개를 넘어서 물우리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집들은 모두 불타고 허물어져 폐허가 돼 있었다. 피란 간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동네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한 움막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박씨 문중의 친척 할아버지 한 분이 불탄 집의 구들 터 위에 볏짚으로 삼각형 움막을 짓고 가족들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우리를 보더니 할아버지가 반갑게 부르셨다.

“오! 너희 왔구나. 이리 오너라. 여기 와서 자거라.”

할아버지는 우리를 반기시며 당신의 잠자리와 손수 지은 밥을 나눠주셨다. 집은 불탔어도 구들장은 온전해서, 그 위에 지은 움막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니 아주 따뜻했다. 그 움막 한쪽에서 비를 피하고 잠을 자면서 나는 `이게 꿈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피란 여정 내내 외면과 박대만 받았던 우리에게 그 환대는 기적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세상이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불에 타 텅 비어버린 동네, 구들장만 겨우 남은 방에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올린 움막에서, 할아버지와 형님과 나는 잠시나마 편안했고 행복했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국군이 진입해서 이제는 ‘반동 가족’이라는 딱지에서도 해방되었다. 우리처럼 재산을 몰수당하지는 않았어도 가산이 모두 불타버린 터에 처지를 가릴 것 없었던 박씨 일가친척들은 우리 형제를 선뜻 도와줬다. 불탄 구들 위에 볏짚 이엉으로 세모난 움막을 지었다. 들판에 반동 재산 몰수 때 남겨진 곡식단들이 방치돼 있었기에 농기구를 빌려다가 벼, 콩, 팥 등 곡식들을 탈곡해 왔다. 그렇게 당분간 살아갈 토대를 만들었다.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서야 겨우 할 수 있었다. 바로 아버지 시신을 찾는 일이었다. 수소문을 해보니, 아버지를 잘 알던 분이 “빨치산 사령부가 주둔했던 회문리 뒷산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보니 과연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구덩이를 파내자 손이 뒤로 결박된 모습의 시신들이 나왔다. 빨치산이 산 채로 밀어 넣고 바위를 던져 죽였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시신을 꺼낼 때 아버지를 먼저 알아본 것은 나였다. 많이 부패돼 뼈가 드러난 시신이었지만 허리띠의 은장식 버클만은 그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늘 만지고 놀던 장식이었다. 형과 나는 겨우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장묘를 했다.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옛날을 그리워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하고 억울해했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 소원도 없었다. 그저 ‘전쟁만 끝나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뿐이다. 치가 떨리는 복수심이나 분노 같은 혈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평화를 갈망할 뿐이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런 평화의 소중함을 알기 어렵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시대의 비극이다. 다만, 그 사이를 뚫고 지나온 내 유년 시절은, 삶 전체로 볼 때 처절한 단련의 시기였다. 살아남았기에 더욱 귀중한 보석과도 같은 단련의 시기였다.

전쟁의 경험이 개인에게 남는 방식도 여러 가지일 텐데 내게는 비인간성과 참혹보다는 유일한 혈육인 형제끼리 의지하며 버티는 가운데 생겨난 가족애와 인간애가 더 크게 남았다. 동생이 굶주리는 것을 보다 못해 포탄 속으로 뛰쳐나갔던 형과, 돌아온 형이 등에서 내려준 하얗고 뜨끈뜨끈했던 밥, 폐허 속에서 우리 형제를 반갑게 맞아주며 움막 한쪽을 내줬던 할아버지, 그 좁은 움막에 붙어 앉았을 때 구들장에서 전해지던 따스함….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함 때문이었는지 그런 순간순간 느꼈던 감동과 감사함은 크고도 깊었다.

그 시절 이후로 나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전쟁 때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 어떤 난관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일과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을 가다듬고 여유로울 수 있었다. 큰 고비를 넘어선 경험이 운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근육처럼 나를 더 강하게 해준 것이다. 그 근육은 다음 고비를 좀 더 쉽게 넘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빌 4:2)을 그렇게 철저하게 배운 것이 이후 살아가는 동안 위기 때마다 귀하게 쓰였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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