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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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 교역자 자녀들 다니던 학교 폐교돼

우학리교회 목회… 일제 신사 참배 맞서다 고문 당해

장로교총회는 일본의 강압에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굴복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기풍 목사는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처음부터 우상숭배를 반대해 온 한국교회가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전남 도서지방을 전도하고 목회할 때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는 신사 참배 반대해 불온 학생이 됐다. 그래서 광주 수피아여고로 전학했으나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됐다. 호주 장로교가 운영하는 일신여고에 진학해 졸업했다. 당시 일신여고는 전국에서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 자녀들이 오는 학교였다. 하지만 결국 일신여학교도 폐교됐다. 

1940년 순천노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됐다. 이 체포사건은 신사 참배 거부와 지상천국 주장과 겹쳤다. 순천노회 목사들이 지상천국을 주장했고, 이것이 일본 국체를 모독했다. 1940년 11월 15일에 새벽 2시 순천노회 산하 목회자 17명이 체포됐다.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므로 노회도 열 수 없었고 총회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목회할 때 70세가 넘었다. 우학리교회 뒤에는 신사가 있었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이기풍 목사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기풍 목사가 체포된 이유는 먼저 신사 참배 거부와 미국 선교사의 스파이였다. 이기풍 목사는 미국 선교사와 협력했고 그가 개척 목회했기 때문에 선교사의 스파이라 했다.

이기풍 목사는 “나는 죽어도 일본 귀신에게 절할 수 없다. 너희가 지금 총을 쏘아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겠다”고 했다. 70세가 넘은 사람은 취조 및 고문이 법률로 금지되었으나 이기풍 목사는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죽게 되어 이기풍 목사는 출감조치 되었으나 나머지 목사들이 나가기 전에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는 우학리교회 목사 사택으로 나왔다.

이기풍 목사는 한반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일제의 신사 참배와 싸우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우학리교회는 지역 유지들의 힘으로 설립됐다. 1908년 4월 5일 예배당 신축을 했으며 초대 최진막 조사의 인도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1938년 1월 이기풍 목사가 5대 목사로 자청해 부임한 후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가는 교회로 지금까지 110년 역사를 잇는 여수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였다. 남면에는 우학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 22개의 교회가 있다. 수평선 너머 동터오는 새벽이 되면 새벽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사람을 깨우던 시절 섬 전체의 인구가 1만5천 명을 넘었었다. 우학리교회에는 이기풍 목사 기념관과 순교 기념비가 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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