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박사는 에어컨도 없는 매버릭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길을 안내하며 떠났고 나는 의사 집사로부터 싸게 산 올즈모빌에 짐을…
뒤돌아본 삶의 현장
미국에서 유학생인 나는 새살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의 장학금으로 세 식구가 살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얼마 동안은 아내가 가지고 온…
한국에서 아내는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6월에 다음 학기 장학금이 확정됐는데도 서류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를 부모님께…
이 대학에는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이 와서 살고 있었다.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부부 아파트가 있어 부부는 따로…
이한빈 총장이 임기를 마치기 전 나는 소망하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대학교수의 자질을 향상하기 위해 모든 대학교수는 박사학위를 가지도록 교육부는…
1973년 김형남 총장은 이제 두 대학이 통합되고 종합대학에 되어 발전의 터전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여 이사회를 통해 제2대 총장으로 이한빈 박사를 추대하고…
1972년부터 1975년 초까지 3년 동안은 내가 대전노회 평신도 연합회장을 맡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언제부턴지 남선교회로 바뀌었다.…
나는 『숭전대학신문』의 주간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중에도 여러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좇고 있었다. 1970년 충남대학교 석사과정을 하고 있으면서 1971년…
김형남 학장은 두 캠퍼스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대전에 황희영 부학장을 두고 두 캠퍼스에 교목실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총무처장을 한 명씩 임명하였다.…
1971년 문교부(앞으로는 교육부로 표기)의 인가를 받아 대전대학과 숭실대학은 통합하여 『숭전대학』이 되고 김형남 이사장이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형남 학장이 맨 처음 한…